말의 약속보다
그것을 이행하는
행동이 더 중요하고
애정이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스탈린의 러시아 공무원들이 독일 나치군의 레닌그라드 봉쇄에 대비해 러시아 최대 국립박물관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예술·공예품들을 옮기는 것에 총동원되는 동안 완전히 무시되었던 바빌로프 연구소.

38만 개가 넘는 보관된 종자는 세계 각국에서 어렵게 채집된 것들로, 연구소의 과학자와 직원들은 굶주림에 지쳐 아사(餓死)하는 와중에서도 끝내 그것들을 지켜냈다.

나치가 세계 최대의 종자은행을 장악해 미래의 식물 육종에 이용할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스탈린 추종자들은 종자은행을 국가 재정만 잡아먹는 그다지 득이 될 것이 없는 짐으로 여겼다. 

스탈린은 바빌로프를 비롯해 수십 명의 과학자들을 투옥했다. 스탈린 추종자들에게는 이 과학자들은 선민의식에 빠져 국가와 러시아 농민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연구를 일삼은 반역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과학자들은 종자를 분산시킨 후,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보살폈다. 

바빌로프 동료 중 헌신적이던 아홉 명이 병으로 숨지거나 굶어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종자를 먹지 않았다. 물론 그들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 레닌그라드 봉쇄가 풀린 1944년 봄까지 70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 

몇 년 후, 러시아 작가 게나디 골루베프는 그 중 살아남은 한 명인 바딤 레흐노비치와의 인터뷰를 빌어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일하는 것이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걸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었으니까요.”

국가에서조차 잉여인간으로 취급되며, 그들이 하는 일이 사치이며 사회를 좀먹는 짓으로 여겼던 그 엄혹한 현실에서도 그리고 굶주림 앞에서도 그들이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소명의식이었다. 

소명의식(召命意識)의 사전적 의미는 ‘부여된 어떤 명령을 꼭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 있는 의식’이다. 의사로서의 소명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정직, 겸손, 성실 등이 직업윤리라고 한다면 소명의식도 그와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소명의식은 신념, 철학 등 종교적 색채까지 포함하고 있기에 보다 깊은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로서의 소명은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일이다. 언론인에게 소명은 국민들에게 편중됨 없이 올바르고 공정한 정보를 알려줌으로써 국민들의 알권리를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맨으로의 소명은 무엇일까?

농협법 개정안이 끝내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난해 많은 농축산단체들이 농업의 현실에 눈과 귀를 닫고 농협법 개정안의 처리를 지연하는 일부 법사위원의 행태를 “국민을 위한 입법 권한을 무소불위 권력처럼 휘두르고 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들 단체들은 “농협법 개정안은 도시농협 도농상생사업비 납부 의무화, 농업지원사업비 부과율 상한 방향, 비상임조합장 3선 제한, 회원조합 조합장 선출방식 직선제 일원화, 회원조합지원자금 투명성 확보, 회원조합 내부 통제 강화, 중앙회장 연임 1회 허용 등을 골자로 한 초당적으로 마련된 것”이라며 반드시 통과시켜줄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부 법사위 의원들은 개정안에 포함되어 있는 중앙회장 연임 1회 가능 허용을 현재 중앙회장부터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셀프 연임’이라면서 농협법 개정안은 현 중앙회장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반대의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연임 1회 가능’을 다음 임기의 회장부터 적용한다고 했으면 농협법 개정안을 법사위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결과론적으로 따져보면 농협 내외부나 농협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던 많은 농축산단체들의 의중은 농협법 개정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중앙회장의 사심(私心)에 생산자단체장들의 선심(善心)이 편승된 헛구호였던 셈이다.  

지난달 25일 중앙회장 선거에서 강호동 후보가 압도적 표 차이로 제25대 농협중앙회장에 당선됐다. 그는 1987년 농협에 입사한 후 2006년 조합장이 되었고, 30년을 넘게 협동조합맨으로 살아왔다. 어느 후보, 역대 회장들의 공약처럼 그도 ‘농민을 위한 농협’, ‘국민에게 사랑받는 농협’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농·축협 경제사업 활성화 등 임기 동안 어떤 일들을 일궈낼 것인지 전체 조합장들 앞에서 확언했지만, 사실 그 공약들이 다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주문하는 것이 있다. ‘애정(愛情)’이다. 농촌에 대한 애정이고 농업에 대한 애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롭게 와닿는다.

애정이 있으면 부정은 강한 긍정이 되고, 긍정은 더 큰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가 생기고 행동 하나에도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도 소명의식이 충만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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