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것 눈앞에 두고
굶어 죽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업(業)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기 때문

인간을 포함한 대형 포유류는 하루에 최소한 1천 칼로리 이상을 섭취하고 이를 소화시켜 에너지를 공급해야 세포조직과 기관이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신체는 주기적으로 허기지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오랫동안 공급이 없으면 체내의 지방, 근육 등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생산하는데, 이것이 한계에 달하면 에너지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신체의 기능이 조금씩 약화되다가 이윽고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장기까지 기능을 잃게 된다. 

이와 동시에 면역력과 체온, 호르몬 분비 등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이 순차적으로 사라지면서 감염과 질병에 취약해진다. 따라서 극심한 기아 상태가 계속되면 병사하거나 다발성 장기 부전 및 혈류량 쇼크로 사망한다. 

이렇게 외부에서 에너지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굶주려 죽는다. 이것을 아사(餓死)라고 한다.

배고픔, 굶주림 속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내버려두고 의연하게 아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1941년 7월,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폴란드를 넘어 (구)소련을 침공했다. 그들의 목표는 레닌그라드였다. 나치의 전격전 속도로 보면 늦여름 즈음에는 레닌그라드에 도착할 것이 예측됐다. 

그해 7월 15일, 스탈린은 나치가 눈독을 들이고 있을 레닌그라드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비상소개하도록 명령했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장 이오시프 오르벨라는 서둘렀다. 역사학자, 학생, 큐레이터, 예술가 수백명이 매달렸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은 러시아 최대 국립박물관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100만 점이 넘는 미술품, 공예품, 보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가치가 파괴되거나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대로 이 모든 유산들이 전국 각지로 옮겨져 살아남았다. 

하지만 상트이사크 광장에 보관된 또 다른 인류의 유산 ‘바빌로프 연구소’의 존립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연구소에는 38만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의 표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것들은 러시아 제정 시절 15개 언어를 구사한 세계적인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가 전 세계를 돌며 채집한 2500여 종의 작물에서 채집한 것들이다. 

이 종자들은 육종연구가들이 이것들을 연구하며 저항력이 약한 품종의 병충해에 저항력을 개선해 기아와 식량난을 막을 수도 있을테고, 뿌리를 깊이 뻗는 심근성 작물을 활용하면 토양침식을 막거나 이미 황폐해진 땅과 환경을 되살릴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이 씨앗들이 유래한 지역들이 대체로 지난 세기에 급변하는 통에 이곳에 보관 중인 씨앗 중에는 다시 채집하거나 다른 씨앗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당시 러시아인 중에는 이 종자은행이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부 관리 중에서도 레닌그라드 봉쇄전에 투입된 독일 군대가 여기에 눈독을 들리고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도 없었다. 

1941년 9월에 시작된 레닌그라드 봉쇄는 900일 간 계속되었고 그동안 이 황량한 도시에서 150만 명의 인명이 사라졌다. 하지만 대부분이 무시하고 방치됐던 이 종자연구소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1941년, 에르미타시 박물관 직원들에게는 대단한 관심과 지원이 쏟아졌지만, 바빌로프의 종자은행과 식물도입소라 블리던 레닌그라드의 경작지에서 일하며 정기적으로 작물을 수확하고 종자를 보충하던 과학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지원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독일이 우생학에 관심을 쏟고 있음에 미루어 볼 때, 반드시 이 종자은행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에 과학자들은 이 중요한 종자들이 광탈당할 것을 염려해 전쟁의 포화를 뚫고 여기저기 종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봉쇄가 심해지면서 그나마 1인당 빵 125그램이 배급되던 식량 공급도 끊어졌다. 연료도 이미 바닥이 난 상태로 극심한 추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곡물이 동나자 양고기의 내장과 맥아분, 소가죽, 그리고 산업재료로 쓰이던 셀룰로스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먹을 수 없는 것까지 죄다 사용됐다. 

1942년 2월 무렵, 레닌그라드 도심과 외곽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 등으로 20만 명이 아사했다. 

바빌로프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사실상 정부의 방치 속에서 종자를 옮기기 위해 이동하던 중 총탄과 포탄에 의해 죽었다. 또 굶주림에 이성을 잃은 군중들로부터 종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주변을 강화하고 불침번을 서며 종자를 지켜냈다. 

그들 역시 굶주림에 처절한 시간을 보냈고 대부분 아사했다. 종자라는 먹을 것을 눈앞에 두었으면서도 기꺼이 굶주려 죽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이 굶주려 죽으면서도 바랬던 하나의 소망은 자신들의 이같은 희생이 전쟁이 끝난 훗날 그 종자들이 러시아와 세상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것이야말로 과학자라는 자신들의 업(業)에 대한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을 선택한 이유와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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