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참사란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당한 죽음을 의미한다. 참담이란 끔찍하고 절망적이어서 몹시 슬프고 괴롭다는 뜻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참담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다. 
누군가의 살의(殺意)로 인해 죽임을 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저 길을 걷다가 끼여 죽고, 넘어져 눌려 죽는, 참으로 허망한 죽음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살려달라고 그토록 애원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했던 정부의 악마성에 분노할 뿐이다. 

 

참담한 죽음 사고로


하도 여기저기서 왜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졌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보도하고 있으니 ‘왜’에 대한 해답은 향후 알려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볼라치면 정말 이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인지 의심정도가 아니다. 
이 정부는 권력에 취한 자신들만의 정부임이 분명하다. 
무능에, 무지에, 무책임에 더해 게으르고 나태하며 거짓말로 일관하는 대통령이나 정부와 여당의 관계자들을 대다수의 국민들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다짐하는 듯하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선출된 권력으로 임기가 보장됐다고 장담할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칫 뭔가에 혹해서 다수결의 결과로 독재적인 정권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장점은 그런 잘못된 선택을 언제든 다시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악의성은 참사를 대하는 국민들의 분노가 어느 수준까지 올라있는지 사찰부터 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허겁지겁 ‘관제의 애도 시간’을 정부가 정하고, 국민들에겐 그 기간 동안에는 조문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자신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경찰을 동원해 ‘동향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통일하라는 정부의 지침은, 모든 책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과 더불어 정부가 이 참담한 죽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사고와 사망자라는 표현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나서 조갑제 씨가 자신의 유투브에서 제시한 것으로 이를 정부가 곧바로 차용했다. 
왜 그랬을까?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고 국민들의 참담함을 일상적인 사고라는 프레임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이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자신의 저서 「1984」에서 말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는 과거와 언어를 조작하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을 만들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획일화를 꿈꾼다고. 
언어를 조작함으로써 의식의 향상을 막는 것이 바로 ‘신어’다. 사람은 언어로 사고한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일지라도 어휘력이 떨어지면 수준 높은 사고를 할 수 없다. 
때문에 언어를 통제하면 대중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84」에서는 언어를 구어와 신어로 구분한다. 신어를 만들면서 수많은 단어를 삭제하고 새롭게 만든다. 
예컨대 체제를 부정하는 ‘나쁘다, 반대한다’는 ‘안 좋다, 안 찬성한다’라는 식으로 이전에 비해 다소 축소되는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가 사용하는 적자 예산, 또는 사업수지 적자라는 말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강제로 애도하라니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를 높이는 영정 사진도 위패도 참담함을 더 ‘조장’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걷어치우고 달랑 꽃만 진열(?)하거나 근조라는 글씨를 뺀 검은 리본만 달라고 강요한다. 
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이 정부는 정말 국민들을 아무 생각도 없는 개‧돼지로 알고 있다는 사실만 입증한 꼴이다. 
애도(哀悼)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정한 애도는 뜻풀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애도다. 느닷없이 정부가 시간을 정해놓고 애도하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선 자들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들이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을 알리도 없다. 자연의 재해로 인한 참사는 애도의 시간이 짧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지 그 원인 앞에서 한없이 느끼는 인간의 초라함을 탓하면 그래도 떠나보내는 시간이 쉽다. 
하지만 인재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진정한 애도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지를 밝히기 전에는 가슴에 쌓이고 쌓여 애간장을 녹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애도해야 하는가? 
K-팝, K-푸드, K-방역, K-컬쳐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 받아온 작금의 대한민국이 도대체 왜? 
그런 대한민국을 사랑해 먼 이국땅에서 찾아온 이들이 왜 길을 가다 죽어야 했을까? 도대체 왜?
대통령은 참사의 책임을 경찰에게만 묻고 있고, 행안부 장관은 매뉴얼 탓이며, 여당은 또 전정부와 북한 탓이고, 전 청와대 관계자는 이젠 왜 자식들이 이태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느냐고 부모 탓을 한다. 
지금 개‧돼지로 취급받는 우리는 지금 대통령에서부터 정부‧여당의 모든 관계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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