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축산을 위해Ⅱ - 성공 후기
지속 가능한 축산을 위해Ⅱ - 성공 후기
  • 한정희 기자
  • 승인 2020.09.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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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 도 금호축산 대표(한우학과 2004년 졸업)

 

브루셀라병으로 실패 거듭

결국 ‘브루셀라 박사’ 인정

 

“농업은 가능성 무한하다”

농고 교사였던 숙부 권유

체대 포기하고 한우 입문

수많은 소 잃는 아픔 겪어

 

청결·주기적인 소독 기본

개량 관심 육성 전문가로

2004년부터 비육우 박차

풀사료 재배 사료비 절감

 

 

 

이행도 금호축산 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올해로 영농경력 17년 차의 베테랑 한우인이다. 

한우 번식에 대해 남다른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우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풀사료 생산에도 공을 들인다. 

이 대표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한 터라 체대에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한국농수산대학 입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농고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숙부가 한 “농업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이 마음을 한농대로 기울게 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우인의 길을 선택했다.

이 대표는 2001년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한농대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을 누구보다 보람차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노력했다. 졸업 후 큰 고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버텨냈다. 그 결과 어느덧 한우 600여마리를 키우며 ‘브루셀라 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육성 전문가로 성장했다. 번식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 인공수정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 대표에게는 자신감과 열정이 넘쳤으며,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됐다. 

이 대표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졸업할 때쯤 소에게 치명적인 브루셀라병이 전국을 휩쓸면서 금호축산까지 덮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아버지가 1997년부터 꾸준히 늘려 온 한우 100마리 전부를 속절없이 땅에 묻어야 했다.

이 대표는 이 일을 계기로 브루셀라병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해 지금은 ‘브루셀라 박사’로 불린다. “농장 청결과 주기적인 소독은 기본이다. 브루셀라병을 겪고 나서 더 겸손해지고 더 철저해진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4년 넘게 공부했다.”

브루셀라병 발생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졸업 이후 16년 동안 브루셀라병 세 번, 결핵 한 번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소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번식우를 구매하고 관리하며 최고 등급 한우를 만들어 내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완성해 가고 있다. 이렇게 쌓은 소중한 지식을 지역 농가들과 공유할 뿐만 아니라 한농대에서 현장 교수로 활동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이 대표는 2004년부터 풀사료를 생산해 판매하고 비육우 육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탈리안 라이그라스와 총체보리(풋통보리)를 직접 재배하고 있다. “주변 농지를 활용해 다양한 종류의 풀사료를 재배한다”며 “이를 통해 사료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고급육 생산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인공수정에 대한 많은 경험에 힘입어 일괄사육 체계를 만들었다. 10년 전부터 암소 입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결과 암소를 300마리까지 늘릴 수 있었다. 현재 전체 사육 마릿수는 600마리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아버지는 축산 선배이자 동반자이면서 최대의 지원군으로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이 대표는 졸업 직후인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한국 4-H에서 활동하며 한국 4-H 중앙연합회장을 역대 처음으로 연임했다. 구제역 방역 활동, 축산 농가 소독 봉사활동, 영세 취약 농가를 위한 콜서비스, 독거노인 집수리 봉사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대표는 한농대 공부까지 치면 20년째 한우와 함께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논농사와 한우 사육을 함께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한우는 항상 이 대표의 삶과 함께 했다. 

이 대표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짜릿함을 경험한 이 대표는 한우 2002마리 사육이라는 원대한 꿈을 목표로 정했다. 이 대표는 “한우 2002마리 사육의 꿈은 단순한 양적 확장이 아니다”라며 “나와 우리가 사는 지역이 함께 성장해 가는 가능성이다. 이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정희 기자 

 

 

 

이 차 승 한승목장 대표(낙농학과 2013년 졸업)

 

부친 목장, 한농대 실습목장

어릴 적부터 젖소들과 함께

 

아버지 권유로 한농대 행

3년 학창시절 폭풍 성장

새로운 것 시도하던 습관

부자 의기투합 큰 시너지

 

2016년 부지 이전하면서

과감한 투자 쾌적한 환경

쉬는 날이 없어 힘들지만

소와 함께 ‘부농의 꿈’ 꿔

 

 

 

 

전라북도 완주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한승목장이 있다. 이 목장을 경영하는 이차승 대표는 올해 목장 경력 8년 차에 들어섰다. 

한승목장은 아버지가 1982년 젖소 두 마리로 시작해, 지금은 전체 사육 마릿수 200마리, 착유우 90마리로 성장했다. 한승목장은 지난 40년의 시간을 지내며 대한민국 낙농업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과 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목장 이름을 ‘한승’이라고 지으셨다.” 

이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대학 진학에 대해 고민할 때, 아버지께서 한국농수산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이때 처음 목장주의 삶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대표는 일찍부터 낙농업과 한농대가 낯설지 않고 친숙했다. 한승목장은 당시 한농대 실습목장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젖소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목장 일에 대한 큰 두려움은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이 대표에게 목장은 이미 삶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농대에 진학했다. 

한농대에서 보낸 3년은 이 대표를 젊은 축산인으로 성장시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해외실습이다. 일본 홋카이도 낙농목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실습생도 엄격하게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현지 직원들과 같은 강도로 일을 하면서 힘들었지만 강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아버지는 낙농에서 만큼은 남들보다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전파하는 편이다. 그런 아버지와 축산을 전공한 아들이 함께 일하면서 목장에 큰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2016년 한승목장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부자는 과감하게 투자했다. 평지에서 5m 이상 올라간 비탈에 축대를 쌓아 올려 우사를 지었다. 새로 짓는 우사에는 천장고를 14.5m로 높게 시공하고, 대형 환풍기와 개방형 지붕 등을 설치했다. 소가 한여름에도 더위에 지치지 않고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그라스와 옥수수를 직접 재배해 풀사료를 자급하는 한편, TMR 사료 자동 급이기를 설치해 소 개체별로 적정한 먹이를 섭취하도록 했다. 착유실을 우사 중앙에 설치했다. 하루 두 번씩 하는 착유 작업에서 소와 사람 모두가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면에서 최고와 최선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이렇듯 뛰어난 설비와 쾌적한 환경을 갖춘 덕에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한승목장에는 다른 목장주와 건설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의욕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가끔씩은 지칠 때도 있다. 하루에 두 번 우유를 짜는 젖소를 새벽 5시부터 돌보다 보면 한 달,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여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살아 있는 젖소와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쉬는 날이 따로 없다. 여행이나 여가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늘 이런 부문이 아쉽다. 그러나 일과 삶의 균형을 잡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 대표는 배움에 대한 갈증도 많다. 24시간 현장에만 있다 보니 일본 홋카이도 농장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이 퇴색돼 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2018년에 모교로 돌아가 4학년 전공심화과정을 마쳤다. 대학원 진학도 계획하고 있다.

축산업은 초기 투입 자본이 많고 수익이 나기까지 최소 2~3년의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규 진입이 만만치 않다. 낙농의 경우 착유 시설은 물론이고 납유를 위한 쿼터까지 필요하다. 낙농 단체, 정부 기관, 유업체들이 모여 결정한 가격에 계약한 양만 납유가 가능하므로 자의적으로 우유 생산량을 늘릴 수도 없다. 늘 고민이 되는 사항들이다.

감내하기 쉽지 않은 고단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무장한 젊은 낙농인은 오늘도 부지런히 자신과 목장의 미래를 차근차근 설계해 나가고 있다.

 

 

 

 김 선 도 선도농장 대표(가금학과 2015년 졸업)

 

양계장 대물림으로 ‘부농의 꿈’

혼자 고민 한계 가금학과 입학

 

재학시절 농기업체 연계

트랙터·유류비 지원 받아

한 달여 선진 농장 방문

낮엔 일하고 밤엔 가르침

 

‘건강 닭 키우기’ 고심 끝

적정온도 환경 쾌적하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줘

매출 20억…고급란 인정

 

 

경기 포천 군내면에서 산란계 10만 마리를 사육하는 청년 농업인 김선도 선도농장 대표는 올해로 축산 경력 13년 차다. 안전한 계란 공급을 위해 무항생제와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인증 등을 받았다. 계란 제값 받기에 힘쓴 결과 생산량의 50% 이상을 직접 유통하는 성과도 달성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양계농장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를 제대하면서, 아버지가 일군 농장을 더 크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나이 23세 때 일이다. 하루에 잠을 5시간으로 줄이며 3년을 매달려 양계장 일을 익혔다.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고 혼자 고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한국농수산대학 가금학과에 진학했다. 

김 대표는 3학년 때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타고난 리더쉽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한농대 학생 중 처음으로 농기계 업체에 연락해서 트랙터 한 대와 유류비를 후원받았다. 한농대에서 농업 관련 기업으로부터 받은 첫 후원이다. 이후 학교에 기업체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후원받은 트랙터를 타고 한 달여에 걸쳐 전국 25개 선진농장을 방문했다. 방문한 농장에서 낮에는 일을 돕고, 밤에는 농장주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관련 내용이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졸업 후 농장 관련 데이터를 정리하며 관리를 체계화하려 노력했다. 또 “어떻게 하면 닭을 건강하게 키울까”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 이를 위해 벽에 냉각패드를 설치해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 케이지 청소를 열심히 한 결과 닭 진드기 서식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농장 근무 인원을 늘렸다. 비슷한 규모 농장들은 보통 2명이 관리한다. 인원을 4명으로 늘리고, 김 대표는 마케팅과 시장조사를 위한 외부 활동을 확대했다. “인건비 상승 등으로 당장의 이익은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해야 할 일이라 판단했다.”

김 대표에게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꼽으라면 의욕적으로 추진한 병아리 사육이다. 잠을 아껴가며 병아리동을 짓고 병아리를 들였지만, 첫날부터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씩 나오던 폐사가 1000마리씩 무더기로 나올 때는 앞이 깜깜했다. 시공업체 부실 공사로 총 8개 층 가운데 4개 층의 급수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무려 12일 동안 하루 한두 시간 쪽잠을 자면서 병아리들이 물을 먹도록 신경쓰면서, 전체 층을 모두 수리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힘들었던 시간이다” 병아리 사육이 안정되면서 농장 전체 매출은 연간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2배 가량 늘었다. 

김 대표의 리더쉽과 경영능력은 위기 때 더 빛이 났다. 계란 품귀 현상으로 한 판에 만원을 호가 할 때 김 대표는 대형마트에 직접 찾아가 7000원 납품을 제안하고 장기 납품 계약을 성사시켰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 때도 먼저 나서서 농산물품질관리원을 통해 농약 성분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를 대형마트에 보여 주며 납품 계약을 늘렸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0% 이내였던 계란 직접유통 비율이 50% 이상으로 향상됐다. 수많은 산란계 농가들이 계란 생산량의 95% 이상을 도매 유통업자에게 넘기는 것과 차별화된다. 

선도농장은 현재 병아리 사육과 분양, 계란 생산과 직접 유통, 계분 퇴비 생산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농장에 식용란 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아 선별포장기를 설치했다. 김 대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총 20억원이 소요되는 식용란 선별포장 집하장 마련을 위해 토지를 마련했다. 지금의 시스템에 식용란 선별포장 집하장을 더하면 선도농장만의 식용란 생산·유통 시스템을 완성하게 된다. 싱싱한 계란이 소비자 식탁에 오를 때까지 청결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과감한 투자다.  

김 대표는 국내에서는 병아리 수준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계란 가공까지 도전한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대한민국 양계산업을 이끌 인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안 태 우 위너팜 대표(중소가축과 2009년 졸업)

 

뚜렷한 목적 없이 입학했지만

졸업·인턴 지나고 양돈전문가

 

돼지 키우는 일 별무관심

막연한 ‘대물림’ 기대감만

동기생들 열정 느끼면서

이 악물고 생활패턴 바꿔

 

“스스로 농장 지어보라”

아버지 권유에 눈앞 깜깜

갖은 고초 겪으며 마무리

지금 연매출 150억 올려

 

 

“깊은 생각 없이 한농대에 갔다. 그러나 3년간의 대학 생활과 5년 간의 인턴 생활을 마칠때는 누구보다 단단한 양돈기업 경영인이 되어 있었다.”

경남 합천에서 돼지 2만 마리를 사육 중인 안태우 위너팜 대표는 한돈인으로 성장한 과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어영부영 졸업하려는 안이한 생각으로 진학을 했지만, 한농대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젊은 축산인 형태를 갖춰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30대 중반인 지금은 연 매출 150억 원을 기록하는 기업가가 됐다.

“고3 때 아버지가 한농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사실 군대 면제에 혹해서 면접을 봤다. 당시 돼지를 키우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른 대학을 네 곳이나 합격한 상태였다. 그러나 공대 나와서 취직하는 것보다 사업체를 물려받는 것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막상 학교에 가니 동기들은 눈동자부터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고 한다. 

자부심과 열정으로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안 대표도 변화해 갔다. 

2학년 때 국내 양돈농장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허리에 탈이나 디스크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14개월을 버텨냈다. 물렁물렁한 마음으로 한농대에 진학했던 자신이 차츰차츰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졸업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희복농장에서 농장일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이 때 농장 성적을 더 향상시키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났다.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농장일에 매달렸다”며 “이렇게 5년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어느 날 “새로운 집(한돈농장)을 지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총사업비가 무려 150억 원에 달하는 큰 사업이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안 대표 혼자 감당하도록 하셨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매입해 둔 부지에는 농장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다. 다른 부지를 마련했지만 행정소송 문제로 5년 6개월을 보내고서야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주민들의 반대를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자금 부문에서 큰 사고가 터졌다. 총사업비의 70%에 해당하는 100억원대 자금줄이 막혔다. 

당초 농식품부 정책자금 지원사업을 통해 2년에 걸쳐 융자를 받기로 했는데, 담당자가 바뀌면서 2년 차 사업비 50억 원이 전액 삭감됐다.  

다급한 나머지 고금리 캐피탈 자금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이자를 1년에 3억 원이 넘게 냈다. 저금리 금융권 자금으로 바꾸기 위해 회계연도를 넘기기 전에 공사를 마무리 해야 했다. 

물 마실 틈도 없이 밤새워 가며 겨우 공사 기간을 맞췄다. 

아버지가 물려준 기반이 있었다지만 150억 원 공사를 차질 없이 마쳤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완성한 한돈농장이 위너팜(Winner Farm)이다. ‘승자의 농장’이란 이름대로 지금은 연간 매출이 70억 원에 이른다. 이외의 사업체 매출을 합하면 연간 150억 원에 달한다. 

안 대표는 위너팜을 짓기 전에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선진 농장을 다니며 꼼꼼하게 준비했다. “외국에 여러 차례 견학을 다녀오긴 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앞선 지 오래됐다. 농업 선진국이라는 유럽, 미국에서 오히려 우리나라에 돼지 사육 기술을 배우러 온다”고 말했다.

또 “우리 농장만 해도 돈분으로는 냄새 안 나는 퇴비나 액체비료를 만들고, 외부로 배출하는 공기는 찜질방보다 냄새가 안 나게 정화시킨다. 돈분을 빗물보다 깨끗하게 정화해서 생활용수로 쓰고 있다.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규제만 강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안 대표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쉬지 않고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대학원 박사 논문은 농장을 짓느라 미뤄 둔 상태다. 안 대표는 “축산 관련 간담회나 포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더 다양한 자리에서 축산업계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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