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검정색 중형과 대형견 초코와 어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인간, 그 거만함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동물애호가도 아니고, 동물보호단체가 주장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에게 온 ‘죽어가던’ 생명을 그저 보호했을 뿐이고, 특별한 사랑을 베푼 적도 없다. 하지만 이런 개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적대적일 경우가 너무 많다.
2년 전만 해도 동네 사람들만 아는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으로의 쪽길은 방학천 변의 산책로와 또 다른 산책코스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 쪽길로 올라가는 입구에 철책이 가로 막혀 있었다.
또 다른 입구에는 ‘개를 데리고 입산하면 벌금 30만원’이라는 커다란 빨간 색 걸개가 걸려 있다. 딱히 이유를 모르겠다. 줄을 매고 입산하는 반려인이 산을 망치는 것일까? 개가 싸는 분변을 아무렇게나 버려두기 때문일까? 의문만 쌓였다.
산책을 할 때 역시 검정색 대형견이라는 이유로 일단 ‘무섭다’며 놀라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항상 똑같다. 크기가 더 크지만 골든 리트리버나 알래스칸 말라뮤트 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나마 개를 좋아하는 반려인도 묻는 것이 “무슨 종이냐”다. 믹스견이라면 관심은 그것으로 끝이다. 아내는 말한다. “종을 따지며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반려인 자격이 없다”고.

 

종 따지며 반려인?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테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선함은 그 대상이 힘이 없을 때만, 순수함과 정직함이 드러날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시험, 그 근본적인 시험은 인류한테 목숨이 달린 자들, 즉 동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는 근본적인 대실패를 겪고 있다”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높일 때, 그 외의 모든 동물은 차별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종차별은 성차별주의보다 우리 안에 더 깊숙이 자리 잡고 단단히 박혀 있다고 동물해방전선의 창립자 론 리는 말한다.
여기에는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도 참여한다. 인간은 문명개화의 과정에서, 동물 세계의 다른 동료 생명체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동물들의 본성 사이에 간극을 벌리기 시작했다면서 이를 ‘인간의 과대망상’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작가이자 역사가인 찰스 페터슨은 저서 <동물 홀로코스트>에서 동물과 약자를 다루는 ‘나치’식 방식에 대해서 “동물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대량학살과 현대사회에서 동물을 노예화하고 학살하는 것이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세히 서술했다.
최근 맛 칼럼리스트의 ‘축산 폄훼’는 아마도 이런 식의 서적을 인용하면서 목자들의 가축을 다루는 잔인한 방법을 국내 축산업에 성급하게 도용한 것이라 추측된다.
페터슨은 인간이 동물을 종차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러한 차별이 바로 폭력을 낳고 성 차별로 이어지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근거를 제시한다.

 

애잔함을 ‘돈’으로


최초로 농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지역인 중동에서 노예의 첫 증거가 나타난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가축화가 인간으로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여성의 성적 종속이 동물의 가축화를 모방했고, 이는 세상의 모든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며, 여성 길들이기는 동물을 소유하면서 시작됐고,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순결과 억압을 강요했다고 지적했다. 동물에 대한 폭력이 인간에 대한 폭력을 낳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와 함께 하는 산책길에서 맞닥뜨리는 오만한 인간상은 그런 의미에서 참기 힘든 메슥거림이다. 도대체 이 개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보기만 한 것으로 그렇게 불편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거부감으로 울컥거린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둥, 동물의 권리를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둥 동물보호단체의 주장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동물은 마땅히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뉘렘베르크 전범재판에 참여한 필립 카플로는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땅의 짐승‧가축‧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들고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모든 것을 다스리게 했다”면서 “인간 최초의 죄가 아담이 에덴동산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라면, 두 번째 죄악은 자연계의 동물들을 죽여서 먹게 한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치는 물론 인간의 테러, 폭력, 유혈사태, 학살과 궁극적으로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숙명적인 사태로부터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매년 초 축산물공판장은 물론 동물을 실험하는 학계 등에서는 축혼제(畜魂祭)를 지낸다.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다. 이것이나마 지내지 않으면 죽이고 찌르고 약을 먹이고 온갖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는 범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향수를 자아내는 그 애잔함을 돈으로 계산하게 되었는지 겸허하게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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