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사육 천직으로…양복보다 작업복 선택”


축산과 졸업 후 농장 취업
군 제대 후 ‘한일축산’에서
양돈의 이론과 현장을 접목
8년 후엔 중규모 농장 이직

이전 직장상사 동업 제안에
‘내 농장의 꿈’ 흔쾌히 수락
선진농가로 올라서기 위해
숱한 벤치마킹 농장에 접목

20년 만에 내 농장을 갖고
처음 시도한 것이 ‘환경개선’
상위 1% 이내 성적도 보유
조경 집중해 악취에서 해방

 

유재흥 삼송농장 대표는 천생 한돈인이다.
1959년 돼지띠, 그것도 돼지 시(亥時)인 밤 9시 반에 태어났다.
돼지띠에 태어나 돼지를 천직으로 알고, 선도농가로써 한돈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온 유재흥 대표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한돈인이 아닐까.
유재흥 대표의 어린 시절은 여느 축산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 대표의 고향인 충남 당진의 풍경은 시골 출신의 이들이 자라온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지으셨고, 부업 겸 남은 잔반처리 요량으로 마당 한 켠의 돼지막에선 돼지 두어 마리를 키웠다.
새끼가 태어나면 가장 튼튼한 암놈을 골라 씨돼지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장에 내다 팔았다. 또한 돼지막 바닥에 깔았던 짚에는 재 등을 섞어 두엄으로 만들어 밭에 뿌리기도 했다.
돼지에게 구정물 등을 갖다 주는 일 역시 4남 1녀 중 막내였던 그의 몫이었다.
“당시 놀거리가 뭐있겠습니까. 새끼돼지를 강아지처럼 안고 다니고 그랬지요”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그를 자연스레 축산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상지영서대 축산과 진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축산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 양복 대신 작업복 선택
그는 기숙사비를 아끼기 위해 강원도 원주의 큰 형 집에서 생활했다.
당시 회사를 다니던 큰 형은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그에게 항상 ‘남의 밑에서 일하지 말고 자신의 사업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80년대 당시에도 축산과를 졸업하면 동물약품이나 사료업계로 많이 진출했지만, 그는 ‘언젠간 내 농장을 운영하겠다’는 꿈을 안고 양복 대신 작업복을 택했다.
당장 몸이 편하기 위해선 회사를 다니는 것이 낫겠지만, 향후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선 직접 현장을 경험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
여러 현장을 몸소 겪어보며 어떤 가축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를 판단하겠다는게 그의 계획이었다.
첫 직장은 경기도 오산 소재의 종계장인 ‘한일농장’이었다. 그는 1년 남짓 가량 이곳에서 근무하며 양계에 대해 파악했다.
하지만 그와 닭은 맞지 않는 궁합이었고, 군대에 다녀온 후 은사인 김상균 교수의 소개로 충남 서산 소재의 ‘한일축산’에 입사했다.


 
# 한일축산 입사해 기본 다져
“1986년 당시 ‘한일축산’은 모돈 1000두가 넘는 대군농장이었습니다. 하나부터 열 가지 배워야할 것 투성이었지요”
어릴 적 돼지를 키워본데다 축산학까지 전공했으니 돼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론과 현장은 괴리가 컸다.
그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양돈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가며 기본을 다졌다.
8년 뒤에는 모돈 250두 규모의 농장으로 이직했다. 나중에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선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규모의 농장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곳에서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기존 PSY 15두에 불과했던 농장성적을 1년 만에 24두까지 끌어올렸고, 농장주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됐다.
그즈음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야무진 성격에 뭐든지 최선을 다하는 그를 좋게 본 전 직장상사가 그에게 동업을 제안한 것.
“먼저 퇴사해 덕산농장을 운영하던 전 직장선배가 농장을 하나 더 차리면서 신규농장인 ‘신덕산농장’을 제게 맡겼습니다”
농장주의 만류에 잠시 고민도 했지만, 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기회를 꼭 잡았다.
이때가 1994년, 그의 나이 36살의 이야기다.

 

# 선진기술 벤치마킹해 농장 접목
“지금까지 30년 넘게 돼지를 키우며 가장 즐겁게 일했던 때로 기억납니다”.
공동 지분이긴 하지만 ‘내 농장’‘내 꺼’라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일에만 매달렸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양돈 경기도 좋았던 데다 PSY 24.5~25두, MSY 23두로 성적도 좋았다. 말 그대로 일하는 만큼의 댓가가 주어졌다.
그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신덕산농장을 선진농가의 반열에 올리기 위해 배울 점이 있다면 벤치마킹해 농장에 접목했다.
도드람양돈농협에 가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조합원들과 함께 양돈 관련정보를 공유하는 한편, 전산관리시스템을 도입해 농장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이를 개선해 나갔다.
이와 함께 90년대 당시에는 생소했던 인공수정을 도입해 종부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퇘지 관리에 드는 부대비용과 시간을 모돈관리에 투자했다.
“전산 및 인공수정 1세대라 할 수 있지요. 허허허”
이같은 노력 덕분에 IMF의 위기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그다.

 

# 20년 만에 내 농장 꿈 이뤄
“20년 만에 진짜 내 농장을 갖게 됐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지요”.
2002년, 유재흥 대표는 마침내 ‘내 농장’의 꿈을 이뤘다.
서산읍 해미면 삼송리에 매물로 나온 농장을 매입한 것. 그는 지역명을 따 ‘삼송농장’으로 명명하고 본격적인 농장 운영에 들어갔다.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환경개선이었다.
옆집 노부부가 ‘파리에 밥 말아 먹는다’고 할 정도로 농장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
그는 농장을 영위하기 위해선 환경개선이 첫째라고 판단, 농장 개조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노후된 축사를 개축하는 한편, 일괄사육농장에서 자돈생산농장으로 과감히 종목도 바꿨다. 2site 사육시 냄새도 덜하고 분뇨처리도 훨씬 용이한 까닭에서다.
이 과정에서 모돈의 규모를 기존 150두에서 350두로 확대하고, 질병의 고리를 끊기 위해 양돈사랑 영농조합법인에 가입해 자돈 위탁사육 계약을 체결했다.
아울러 3주 그룹관리를 도입해 관리자의 작업효율 향상과 함께 모돈의 번식성적을 더 끌어올렸다는게 유 대표의 설명이다. HACCP 인증 획득은 물론이다. 이같은 노력으로 현재 삼송농장은 PSY 26두, MSY 24.5두로 상위 1% 이내의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 한돈산업 인식개선 위해 힘쓸 터
한돈산업의 인식 개선을 위한 투자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지요. 본인은 아파트에 살면서 농장에 출퇴근하면서 주민과의 상생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때문에 그는 양돈장 바로 옆에 집을 신축하는 한편, 이 과정에서 조경작업을 함께 진행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 소나무와 꽃나무까지 언뜻 보면 ‘별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다.  지난 2016년에는 서산시가 선정한 깨끗한 농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돈사지붕에는 중앙집중배기 방식의 악취저감시설(KWL)을 설치해 냄새와 먼지를 70~80% 가량 저감해 배출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한돈산업을 위해선 주민들과의 상생은 필수라는 것. 또한 양돈산업이 ‘냄새나고 더러운 혐오시설’이라는 오명을 벗겨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올 봄 돈사를 개보수해 최신식 시설로 탈바꿈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양돈산업 발전을 위한 인식개선을 위해 힘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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