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시작…더 많은 노력, 더 많은 투자

 

두금철 전북 정읍 오성농장 대표의 인생은 늘 축산현장과 함께였다. 축산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에 소재한 낙농농협에 입사한 그는 낙협에서 함께 근무하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꾸렸다. 늘 축산현장에서 보고 듣고 익히며 축산 현장을 누볐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엔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그를 안달 나게 했다. 말 그대로 현장을 함께 할뿐이지 내 것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돌연 낙협을 그만두고 내일을 찾아 나섰다.

 

# 서른즈음에

전북대학교 축산학과를 졸업한 두금철 대표는 곧바로 낙농농협에 입사했다. 1997년 낙농농협에 입사하고 2000년 그의 아내 유선씨와 결혼을 했다. 두금철 대표와 그의 아내 유선씨는 지리산낙협의 사내 커플이었다. 대학졸업부터 취업, 결혼까지 거침없이 살아온 그에게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바로 IMF였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IMF의 여파는 조합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시 두 대표 부부가 다니던 낙협은 신생조합인데다가 경제사업만 할 수 있는 집유조합이기 때문에 경영상황이 나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합이 어려움을 겪다보니 직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쳤고, 두금철 대표 부부는 특단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아내 유선씨가 낙협을 그만둔데 이어 곧바로 두금철 대표도 사표를 던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하나.

두금철 대표는 “언젠간 내 사업을 꾸려나가겠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이 결심을 굳힐 수 있게 만들었다”면서 “가정도 꾸렸으니 가장으로써의 역할과 책임감 또한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십년동안

2001년 낙협을 퇴사하고 꿈인 낙농목장을 꾸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낙농후계자도 아닌 그가 맨땅에서 맨손으로 목장을 일구기까지는 수년을 넘어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초기 투자비용이 높아 신규 진입이 어려운 낙농산업의 특성상 종자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그는 조사료 관련 사업을 하면서 낙농가들과 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일상을 통해 낙농산업 현장의 다양한 모습들을 접한 그는 그것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하면서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적당한 목장 부지나 매물로 나온 목장들을 꼼꼼히 살피고 끝끝내 딱 맞는 목장을 인수했다.

그는 늦게 시작한 만큼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더라도 완벽한 목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육성우 목장을 인수하고 착유 시설 등 낙농에 필요한 것들을 추가로 구비하는 방법을 택했다.

기존에 낙농목장들은 사육 규모가 제한적인데다가 시설이 노후 된 곳이 많아 새롭게 시설을 채비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두 대표는 “내 목장을 세운 것이 내 나이 마흔이었다. 앞으로 이변이 없는 한 내 힘이 닿을 때까지는 목장을 일궈나갈 것인데 당장 투자가 아까워 낙후된 시설을 택한다면 내 미래 또한 보장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리가 되더라도 착유 시설을 새로이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내 인생의 성적표

2011년 300kg의 쿼터를 매입해 납유를 시작했던 두 대표는 7년여 만에 7배로 규모를 늘렸다. 현재 납유량은 2.1톤. 쟁쟁한 낙농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생산 규모가 늘었다. 게다가 안전한 원유 생산을 위해 친환경인증, HACCP 인증 등을 획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목장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부채들도 상당부분을 정리하고 이제 안정적인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을 이뤄내고 거머쥔 데는 그의 남다른 경영철학이 한몫했다.

“할려면 제대로 하자”는 두 대표의 철칙답게 목장 경영에 있어서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는 “목장이 단순하게 생산을 하는 곳이 아니라 나와 내가족의 미래가 걸려있는 사업장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면서 “기록 관리와 생산 관리를 통해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기에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그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더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목장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한 만큼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목장의 성적과 경영 지표가 내 인생의 성적표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두 금 철 대표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실패도 젊을 때 하는 게 좋다”

퇴사 때 아내의 조언이 큰 힘

애로사항 주변 낙농가와 풀어내

 

“한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결혼 후 1년 만에 낙협을 그만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늘 축산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퇴사 이후에도 축산업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십년 만에 꿈을 향한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두금철 오성농장 대표는 맨손으로 시작해 남부럽지 않은 목장을 일궈 낸 산 증인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일념 하에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두금철 대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업자는 그의 아내 유선씨.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내일을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불평불만 없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금철 대표 당시 아내가 한말을 잊을 수가 없다. 아내 유선씨는 ‘실패를 하더라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그의 꿈을 응원해 줬다. 그는 “꿈을 향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타올랐지만 가장이기에 생계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 당장에 목장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면서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가족을 생각하며 차근차근 꿈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내뿐만 아니라 목장이 빠른 시간 내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주변의 낙농가들이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을 현장에서 직접 실행할 때는 시행착오는 당연한 일. 그는 이를 인복으로 극복했다. 두금철 대표는 “축산학과 졸업에 낙협에서 근무하고 조사료 사업에 이르기까지 늘 낙농가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 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현장에서는 초반에 다양한 애로사항들이 줄을 이었다”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은 주변의 낙농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받아 이를 비교적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 깨달은 것이 세상은 나만 잘났다고 해서 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궈낸 결과물들을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절대 만들어 낼 수 없었다는 것. 그는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깊게 새기게 됐다”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