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의무를 강요하지 않았다.

밤새 창을 두드린 새하얀 비도

머릴 감고

빠알간 프라스틱 대야에 흩어진 머리카락도

파리한 턱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도

떨어져 나간 수염과

비누를 묻힌 면도기의 떨리는 칼날도

의무를 독촉하지 않았다.

 

바늘처럼 파고드는 빗방울

몸시린 기억

토악질의 의미도

망각의 달처럼 뒤돌아 앉는다.

 

오늘도 우리들은

거짓말 하고, 으스대다

긴 밤을 보낸다.

 

달빛이 바다 위에서

땅위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동공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작은 방에 이유 없이 붙어 있는

창에서 웃는다.

 

아무 것에도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은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그렇게 진실은 고독한 것이라고 욕하다가

너저분한 술집에 함몰하여

그저

살아있다는 안도감으로

힘차게 술과 악수할 뿐이다.

 

우리들은 실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으면서

매번 부끄럽다고

거짓말 한다.

 

우리들은 실은

아픔이 뭔지 모르면서

매번 아픈 척 한다.

 

‘우울’의 시간이 길어진다. 기쁨이 감염되듯 우울도 전염된다. T.S 엘리엇은 일찍이 「황무지」에서 “4월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물오르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더욱 ‘잔인한’ 달”이라 했지만, 직장인들에겐 12월이야 말로 잔인한 달이 아닐까?

40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누군가는 박수를 받으며 떠나고, 누군가는 뒤에 남은 이들의 서운함과 아쉬움 때문에 ‘동정’이라는 비루한 감정으로 퇴직을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재취업이라는 재기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직원들은 승진을 해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고, 누군가는 누락되거나 더 심하면 ‘좌천(?)’ 당했다는 아픔으로, 스스로 낙인을 찍으며 술잔의 술을 털어넣는다.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아픔을 감추는 남자 직원이나, 눈물이 가득한 눈망울에서 연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여직원의 우울은 다시금 전염병처럼 가슴으로 스며든다.

러시아 국민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아무리 위로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그대들의 잘못도 아니고, 능력이 결코 부족한 것도 아니니 큰 자책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기를….”

산을 오르다 보면, 틀림없이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법한 곳에도 흔적이 쌓여 길이 나 있다. 누군가도 같은 고민으로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짙초록 잎들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고 그 햇살 때문에 잎들은 또 검게 변한다.

벌레도 울지 않고 가벼운 바람의 스침만이 귓가에 맴돈다. 상념의 꼬리를 상념이 물고 풀과 나무와 햇살이 나와 어울리면서 세상에 덩그러니 남은 날 위로한다.

산길은 갈 때마다 다르다. 같은 길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도 같지 않다. 햇살의 오묘함과 어울리면 산도 천변만화이다.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또 다른 세계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널려있는 자연과 신선함과 정상에 올랐을 때의 만족감과 그 과정을 즐긴다.

산에 오르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오르는 작업 자체가 힘겹다. 그들이 오를 때와 내리막을 걸을 때, 그 의미를 알기까지에는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를 겪지 않으면 안된다.

산을 오르는 일은 인생과 같다. 숨이 차 결코 오르지 못할 순간이 오면 반드시 언덕은 끊기고 평지가 있거나 내리막길이 나 있기 마련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견디지 못할 아픔은 없으니까. 지금의 아픔은 시간이 흐르면 치유되기 마련이니까. 조직에서의 생활이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과의 협력보다 피하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이 일상이니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은 연속되기에.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안다.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좌절감. 자신의 능력이 과소평가됐다는 실망감, 노력과 충성에 대한 배신감. 그 어느 것이어도 충분한 아픔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의 상실이다. 하지만 어쩌랴 삶은 이어져야 하거늘.

제자리를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축하와 따뜻한 위로를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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