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일간지의 한 부서장은 칼럼을 통해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문에 한국의 경제가 중국보다 10여년을 앞질렀다고 했다. 변화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정신 개조’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중국이,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체제 전반이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뒤졌다는 이야긴데, 사실 이 말은 틀렸다.

문화대혁명은 그 이전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원인이고, 대약진운동은 1958년에서 1962년까지 4년 동안, 중국의 모든 기반 시설을 파괴했으며 전국에서 최고 5000만명의 인명이 기아와 그와 연관돼 죽음을 당한 참극의 역사다.

 

과도한 자신감 결과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한 사람의 ‘과대망상’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국가 전체의 능력을 도외시한 채 과도한 자신감이 어떠한 결과를 나타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시작은 이랬다. 1957년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외국 당 대표단들을 앞에 두고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기조연설에서, “우리 계획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향후 15년 안에 소련은 미국 중요 생산품의 현재 산출량을 따라잡을 뿐 아니라 능가할 수 있다”며 자신의 경제 드라이브의 성공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세계 공산주의의 맏형을 두고 소련과 자리 경쟁하던-은, 자신도 상당한 증거를 바탕으로 산업 강국인 영국을 15년 안에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약진운동의 선언이었다.

베이징에 돌아온 지 2주도 안된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은, 자신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당 내외의 인사들에 대한 공격과 탄압으로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고, 결국 ‘전력투구하고, 목표를 더 높게 잡고, 더 많이 달성해, 더 빠르고 더 많은 경제적 결과를’이라는 구호를 당의 노선으로 확정했다.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한 마오쩌둥은 대규모 치수사업을 전개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주민을 대거 동원하기 위해 집단농장들을 통합했고 거대한 인민공사가 출현했다. 토지와 노동을 비롯 거의 모든 것이 집산화됐다. 공사 식당이 개인부엌을 대체하고, 아이들도 보육시설에 맡겨졌다.

 

아부하는 주변 경계

 

점점 높아지는 철강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농민들의 쟁기와 호미는 물론 철로 된 모든 도구들을 빼앗아 철 제품을 녹이는 토법고로(土法高爐)가 이용됐다. 농사를 지을 농민이 동원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기근 발생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에게 잘 보이려는 당 간부들은 목표량을 부풀리기 시작하면서, 개인 소유의 밭, 무거운 연장, 가축을 모두 공사에게 넘겨야 했다. 농민들은 극히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똥도 집산화돼야 한다’는 슬로건까지 나왔다.

이에 맞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최대한 건지고자 애썼다. 가축을 도살하고 곡물을 감추고 자산을 내다 팔았다. 심지어 연료로 팔기 위해 자기 집의 마룻바닥을 뜯어냈다. 한때 구두쇠였던 이들은 저축액이 몰수될 것을 걱정해 갑자기 과시적 소비에 빠져들었다. 갈수록 높아지는 목표치에 집도 몰수됐다.

프랑크 디쾨터의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에 따르면 1959년 여름과 1960년 여름까지 단 1년 동안 수천만 명의 주민들이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현지의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이전에 발표됐던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수 100~3200만 명’은 적어도 4500만 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참극이 기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위신을 걸었던 사회경제 체제의 붕괴,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가들을 공격한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했음을 지적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지도자의 강한 과시욕으로 몰아 부친 결과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 지를 잘 보여준다. 또 그 과정에서 주변의 권력욕과 자리보전에 연연한 사람들로 인해 목표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 지를 끔찍하게(?) 잘 보여준다.

 

선언적 의미 불필요

종합일간지의 한 부서장은 칼럼을 통해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문에 한국의 경제가 중국보다 10여년을 앞질렀다고 했다. 변화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정신 개조’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중국이,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체제 전반이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뒤졌다는 이야긴데, 사실 이 말은 틀렸다.

문화대혁명은 그 이전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원인이고, 대약진운동은 1958년에서 1962년까지 4년 동안, 중국의 모든 기반 시설을 파괴했으며 전국에서 최고 5000만명의 인명이 기아와 그와 연관돼 죽음을 당한 참극의 역사다.

 

과도한 자신감 결과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한 사람의 ‘과대망상’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 국가 전체의 능력을 도외시한 채 과도한 자신감이 어떠한 결과를 나타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시작은 이랬다. 1957년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외국 당 대표단들을 앞에 두고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기조연설에서, “우리 계획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향후 15년 안에 소련은 미국 중요 생산품의 현재 산출량을 따라잡을 뿐 아니라 능가할 수 있다”며 자신의 경제 드라이브의 성공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세계 공산주의의 맏형을 두고 소련과 자리 경쟁하던-은, 자신도 상당한 증거를 바탕으로 산업 강국인 영국을 15년 안에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약진운동의 선언이었다.

베이징에 돌아온 지 2주도 안된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은, 자신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당 내외의 인사들에 대한 공격과 탄압으로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고, 결국 ‘전력투구하고, 목표를 더 높게 잡고, 더 많이 달성해, 더 빠르고 더 많은 경제적 결과를’이라는 구호를 당의 노선으로 확정했다.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한 마오쩌둥은 대규모 치수사업을 전개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주민을 대거 동원하기 위해 집단농장들을 통합했고 거대한 인민공사가 출현했다. 토지와 노동을 비롯 거의 모든 것이 집산화됐다. 공사 식당이 개인부엌을 대체하고, 아이들도 보육시설에 맡겨졌다.

 

아부하는 주변 경계

 

점점 높아지는 철강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농민들의 쟁기와 호미는 물론 철로 된 모든 도구들을 빼앗아 철 제품을 녹이는 토법고로(土法高爐)가 이용됐다. 농사를 지을 농민이 동원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기근 발생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에게 잘 보이려는 당 간부들은 목표량을 부풀리기 시작하면서, 개인 소유의 밭, 무거운 연장, 가축을 모두 공사에게 넘겨야 했다. 농민들은 극히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똥도 집산화돼야 한다’는 슬로건까지 나왔다.

이에 맞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최대한 건지고자 애썼다. 가축을 도살하고 곡물을 감추고 자산을 내다 팔았다. 심지어 연료로 팔기 위해 자기 집의 마룻바닥을 뜯어냈다. 한때 구두쇠였던 이들은 저축액이 몰수될 것을 걱정해 갑자기 과시적 소비에 빠져들었다. 갈수록 높아지는 목표치에 집도 몰수됐다.

프랑크 디쾨터의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에 따르면 1959년 여름과 1960년 여름까지 단 1년 동안 수천만 명의 주민들이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현지의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이전에 발표됐던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수 100~3200만 명’은 적어도 4500만 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참극이 기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위신을 걸었던 사회경제 체제의 붕괴,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가들을 공격한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했음을 지적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지도자의 강한 과시욕으로 몰아 부친 결과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 지를 잘 보여준다. 또 그 과정에서 주변의 권력욕과 자리보전에 연연한 사람들로 인해 목표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 지를 끔찍하게(?) 잘 보여준다.

 

선언적 의미 불필요

 

한 국가의 예라고? 제어되지 않고 질주하는 권력은 국가나 거대한 조직이나 모두 매 한 가지일 뿐이다.

2016년 김병원 회장이 농협중앙회장에 당선되자, 전남 지역 일간지에서는 ‘농업 대통령’이라는 헤드 카피가 등장했다. 전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중앙회장에 당선된 것에 고무돼 좋은 제목이라고 썼던 모양이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어림도 없는 제목이었다. 바로 ‘괘씸죄’가 적용됐다. 지역본부에서 ‘쓰지 말아 달라’는 협조공문이 돌았다.

의욕이 넘치는 김 회장은 ‘농가 소득 5000만원 시대’를 들고 나왔다. 이번엔 농림축산식품부가 발끈했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을 농협이 주장하고 나섰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농협의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는 ‘농림축산식품부·농협의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로 바뀌었다.

“5000만원 시대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탓할 이유는 없다. 농가의 소득을 올려주기 위해 농협이 앞장서서 노력하겠다는 것이니, 농민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배당된 부문별 목표치를 보면 농협조차 왜 ‘선언적’의미에 집착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한 국가의 예라고? 제어되지 않고 질주하는 권력은 국가나 거대한 조직이나 모두 매 한 가지일 뿐이다.

2016년 김병원 회장이 농협중앙회장에 당선되자, 전남 지역 일간지에서는 ‘농업 대통령’이라는 헤드 카피가 등장했다. 전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중앙회장에 당선된 것에 고무돼 좋은 제목이라고 썼던 모양이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어림도 없는 제목이었다. 바로 ‘괘씸죄’가 적용됐다. 지역본부에서 ‘쓰지 말아 달라’는 협조공문이 돌았다.

의욕이 넘치는 김 회장은 ‘농가 소득 5000만원 시대’를 들고 나왔다. 이번엔 농림축산식품부가 발끈했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을 농협이 주장하고 나섰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농협의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는 ‘농림축산식품부·농협의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로 바뀌었다.

“5000만원 시대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탓할 이유는 없다. 농가의 소득을 올려주기 위해 농협이 앞장서서 노력하겠다는 것이니, 농민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배당된 부문별 목표치를 보면 농협조차 왜 ‘선언적’의미에 집착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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