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이 이상고온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비는 가끔 내리지만 찔끔이다. 저수지는 마르고, 논·밭은 쩍쩍 갈라져 작물은 타고 있다. 농협중앙회 전 사업장과 일선 농축협 직원들이 현장을 방문해 일손을 돕거나, 급수 지원에 구슬땀을 흘린다.

현장 위주의 경영을 모토로 삼고 있는 김병원 회장이 농협중앙회를 이끌면서, 직원들의 농촌일손돕기는 붐을 이루고 있다. 주로 휴일에 현장을 찾아 뙤약볕에서 농부의 살인적인(?) 일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다녀온 직원들은 “힘들다”지만 당연한 듯한 모양새다. 협동조합 이념을 재교육 받아서일까?

 

농협 빼고는 없는 듯

 

어찌 보면 협동조합을 비롯, 농업을 근간으로 먹고사는 여타 전후방산업의 관계자들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타들어가는 농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농협을 제외하곤 그다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농협이 농민의 ‘비빌 언덕’이니 농협의 입장으로선 당연한 일이기에, 그 조직 내의 임직원으로선 감내할 일이다.

“농협 조직이 가뭄 피해의 극복을 위해 정말 제 역할을 다하고 있구나”, “역시 농협만이 농민을 위한 조직이었어”라는 큰 호응을 들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반응은 그렇게 뜨겁지 않다는 것은 ‘제 자랑’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가뭄이 끝나고 나면, 아니면 기후변화에 따라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그때도 농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하는 농촌일손돕기 등 현장 인력동원에만 목을 매야 할까?

김병원 회장은 지난해 3월초 중앙회장 취임사에서 향후 4년간의 지향점과 세부 추진 계획들을 밝혔다. 농업인과 농축협 발전에 기여하는 ‘슬림화’된 조직으로 개편, 농업인에게 실익이 돌아갈 수 있는 사업 시스템 혁신을 통한, 농협에서 공급하는 자재 가격의 적정화, 농·축협 간 경합이 발생되지 않는 지원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컨설팅 강화, 교육 강화를 통한 협동조합 정체성을 회복하겠다고 했다.

김 회장은 “위기일수록 근간을 바로 세우는 일이 위기 극복의 대처인 만큼 농협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이념교육’을 추진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겠다”고 배경을 설명됐다. 그 취지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소재 ‘농협이념중앙교육원’이 개원됐다. 중앙회를 비롯 자회사 임원들, 지역 농축협 임직원들이 입교해 2박3일의 일정으로 특별교육을 받는다.

 

과거로 되돌아가기

 

김병원 회장이 교육을 중시한 데에는, 반평생을 협동조합에 몸 닫으면서 느꼈던 임직원들의 업무를 대하는 자세의 해이함을 보면서, 올바르고 확고한 정신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왜 1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당시 김병원 회장의 취임 일성을 다시금 꺼내드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농협은 20세기의 이념에 쌓여 개혁과 혁신의 방향마저 ‘과거’에 지향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김병원 회장 앞에서, 그 누구도 “이건 아니다”고 말하지 못한다. 협동조합의 이념을 들이밀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만큼 현장과 이론을 통해 쌓아온 이념이 강하다는 뜻이다.

기업의 목표가 ‘생존’이어서는 안 되듯, 협동조합의 목표도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성장이어야 한다. 농협은 위기가 닥쳐서야 마지못해 개혁에 나섰다. 신용과 경제가 분리되고 올해 경제지주로써 첫 발을 디뎠다.

신경분리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는 “향후 5년이면 자본금조차 다 까먹을 것”이라는 자조섞인 목소리가 높았다. 직원들도 협동조합맨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부속품, 하인, 사무직원 등으로 표현할 정도의 자괴감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김병원 회장의 협동조합 이념 교육 강화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한 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다. 농민은 물론 협동조합을 둘러싼 환경이 20세기와는 천양지차로 바뀌었다. 이념은 ‘운동체’다. 이념이 상황에 맞춰 움직이지 않으면, 이념은 그냥 정체된 ‘낡은’ 목소리에 불과하다.

 

적응 못하면 몰락 뿐

 

굳은 이념만으로는 조직은 생존하기에도 버거울 뿐이다. 신용을 제외하고 농협도 경제지주로 재편됐다. 경제지주는 사업이고, 사업은 성장하지 못하면 망하는 길 뿐이다. 성장하려면 주변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계를 둘로 나누어 냉전체계를 초래했던 공산주의도 망했다. 이념이 투철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의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워 호스war horse」의 한 장면이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마부대장은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전의 전쟁에서 기마부대는 현대의 ‘기갑부대’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때문에 부대장은 기마부대의 위력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천천히 발을 뗀 말은 적진을 향해 가면서 점차 속도를 올린다. 기마부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부대원들은 주저 없이 칼을 뽑아들고 쏜살같이 치고 들어간다. 하지만 적진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대원들은 몰살당했다. 병사들의 무기가 달라지면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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