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의 습격이 있었다. 건물 주변은 기마 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직원들을 붙잡아 두들겨 패면서 M37 트럭(일명 쓰리쿼터)에 짐짝 싣듯 무자비하게 실었다. 이미 타고 있던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댔다. 35명의 직원들이 끌려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부를 압수해갔다.

심지어 그 자리에 나타난 권승렬 검찰총장은 가슴에 총을 들이민 경찰한테 몸을 수색당했고 권총도 빼앗겼다. 당시 ‘경찰의 쿠데타 사건’으로 불리운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다.

 

경찰이 ‘개’역할 충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국회인 제헌국회는, 일본의 조선 침탈과 지배에 협력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헌헌법 101조에 따라 ‘반민족 행위 처벌법(반민법)’을 만들고 ‘반민 특위’를 구성했다.

이후 반민 특위는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 반민족 행위자들을 조사해 재판부에 넘겼다. 친일파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한 정부는, 국회 등에서 제동을 걸었고, 경찰은 그 행동대로서 ‘개’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 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국내 또는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해오던 인사들이 광복을 맞은 조국에서 또 다시 그들에게 체포, 고문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당했던 것이다.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대로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함으로써 반민 특위 활동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그해 9월 5일 관계기관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총 682건이 취급돼 408건의 영장이 발부됐고, 그중 검찰부에 기소된 건수는 221건, 재판부 판결 40건 중 체형(體刑)은 14건에 불과했다.

친일파들 대부분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아예 재판도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에 동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서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계속 살아남아 호위호식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바보

 

40년 동안의 일제강점기였음에도 그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우리와, 단지 몇 년 간의 나치 치하 속의 협력자들을 엄격히 처리한 유럽은 그런 의미에서 비교가 된다. 프랑스의 경우 체포된 99만 명의 협력자 중 15만8000명이 공식적인 사법기관에 의해 형을 선고 받았다. 여기엔 각지에서 벌어진 사형(私刑)은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엄벌에 처해진 것은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 책임자와 뜻을 굽히거나 왜곡하면서 세상에 아첨하는 데 선봉에 선 언론인이나 작가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과거사 청산’이었다. 친일파에게 부패는 생리현상이다.

이들이 사회 각계로 진출하거나, 장악하고 지도자와 오피니언 리더 행세를 하면서 제대로 된 가치관이 형성될 수 없었다. 언론인 최석채 씨는 “1950~1960년대에 정의롭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 받은 것은 그 사회가 친일파 세상이었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친일파들은 ‘반공’을 앞세워 자신들을 공격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고문하거나 암살했다. ‘청산’의 ‘청’자만 나와도 “지금이 어느 시댄데 아직도 그런 주장이냐”고 누리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 코너로 몰아붙였다.

박근혜 전 정권은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면서 청소년들이 ‘자학 사관(自虐 史觀)’에 물들지 않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자학 사관은 일반 국민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정당성을 옹호하던 친일파들이 만들어 낸 역사관이다.

또 촛불 민심으로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적폐(積幣)’도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다. 이 역시 박근혜 전 정권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런데 이제 언론이나 학계나 재계나 솔솔 ‘협치(協치)’를 꺼낸다. 그리고 협치를 하려면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그렇다면 ‘사드’도 적폐냐”며 적폐의 의미를 희석시키려고 한다.

 

기회 다시오지 않아

 

친일파의 생리현상으로 만연된 사회 각계의 ‘부패’를 도려내자는 것이 그동안 쌓여온 적폐청산의 본뜻이다. 법망을 피해 돈을 벌어 권력을 사거나, 교묘히 법의 허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가진 것을 불리거나 누리며, 삶이 고단하지만 법을 지키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시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온갖 부정과 부조리로 평범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빼앗는, 파람치한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현실화하자는 뜻이다. 법과 원칙과 정의가 바로선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바로 ‘촛불의 정신’이다.

적폐 청산은 쉬운 길이 아니다. 개혁과 혁신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남의 희생을 전제로 자신의 이익을 얻는 이들의 저항쯤은 견뎌낼 강단이 필요하다. 한반도 주변은 지금 혼란기다. 지금과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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