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
  • 권민 기자
  • 승인 2014.09.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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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군인이자, 레지스탕스 출신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국 대륙에서의 참전과 투옥을 경험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933년 「인간의 조건」을 발표했다. 1927년 3~4월의 중국 상하이를 중심무대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충돌 등으로 벌어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세 명의 주인공이 겪게 되는 참혹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달리는 열차의 불화로 속에 던져질 고통스러운 최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를 동료에게 선 듯 양보하는 한 테러리스트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자이다.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

 

작가는 가장 인간다운 길은 맹목적인 이 세계와 불공정한 사회의 온갖 흉폭한 힘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소설가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도 자전적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 말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은 사상과 이기심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동경외국어대학 영문과 재학시절 서클과 연구회 활동을 이유로 특고경찰에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집합주의의 광기’에 진저리치면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만주의 제철소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주인공 ‘가지’는 사실상 자신이다. 만주 광산회사에서 노무관리 일을 맡았다. 산출증대만을 위해 중국인 포로들을 학대하는 조직에 항거하다가 끝내 군에 징집돼 관동군에 배치된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으로 전쟁을 확대하는 것을 보고 ‘아시아를 유럽 등의 제국주의에서 해방시킨다’는 당시 일본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침략일 뿐이며, 반드시 패전의 쓰라린 경험을 갖게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반박한다.

그러나 그의 인간의 조건은 말로와는 조금 다르다. 말로의 주장이 보다 선명하고, 고미가와의 경우는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고민하면서 도대체 인간의 조건이란 뭔가를 고민한다.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전쟁에 끌려 들어가면서 살생을 하고 괴로워하기를 반복한다.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친 아내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은 징집된 이후부터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속죄하고 슬퍼한다.

 

진정한 리더 없기 때문

 

소련군 탱크부대를 만나 부대원이 전멸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가지는 아낙네들만 살아 남은 피난민 부락에 들어가고, 우연히 그곳을 지나는 소련군과 일전을 겨루며 ‘옥쇄’를 감행할 수도 있지만 피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포로를 선택한다. 수용소에서 싸우지도 않고 먼저 항복한 일본군 선배들의 횡포를 보면서 악독한 동료를 살해한 후 수용소를 탈출, 아내 곁을 그리워하면서 차가운 벌판을 가로지르며 「인간」이 무엇인지, 변모한 자신이 정말 아내에게 떳떳하게 돌아갈 수 있는 지 물으면서 눈보라 속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들의 공통된 배경은 전장이다. 인간성이 가장 쉽게 나타나는 때는 극한의 상황 속이다. 그 극한의 상황은 전장에서의 인간이다. 죽음이 눈 앞에서 수시로 전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미가와의 이 책은 1300만부가 팔렸고, 9시간 30여분 짜리의 영화로 제작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상영하는 극장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일본 침략전쟁의 부당성을 적극적으로 지적한 반전영화이다.

이러한 고민은 소설가 최인훈 씨의 「광장」으로 이어져 이데올로기에 대한 좌절감으로 표출됐고, 국가의 폭력, 부조리로 점철된 진영의 논리에 함몰된 군상들에 섞이지 못하는 「회색인」으로, 이문열 씨의 「변방」으로 표현됐다. 이런 소설들이 수 십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스터디 셀러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 「명량」이 개봉 35일 만에 관객 1700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며 이순신 장군에 관한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현상은 또 왜일까? 스스로 자성하고 행동하는 진정한 리더가 없기 때문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이나 입법기관인 국회나 행정을 담당하는 정부나 다 키운 귀한 아들을 위탁받은 군이나 그 어느 한 곳 썩지 않은 곳이 없고, 작위적 해석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작태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괴감 마저 갖게 됐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 지 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누군가 ‘모두의 책임’이라고 얼버무린다.

 

나를 위한 사심 버려야

 

「세월호」 문제 해결을 두고 한 보수신문은 미국의 예를 들면서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어떻게 미국과 지금 우리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는 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의료자원봉사 한 사람을 위해 자국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전세기를 띄워 데려간 나라, 전사자 한 명까지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나라 정도면 이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지도 않는다.

총구를 청와대로 겨누고 「세월호」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야당의 행동도 우리를 좌절하게 한다. ‘시어머니보다 더 미운 올캐’다. 진정성이 없기는 정부나 여당도 매한가지일 뿐이다. 대통령도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일 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맹목적인 이 세계와 불공정한 사회의 온갖 흉폭한 힘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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