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이맘때 한 방송국에서 인턴생활을 하던 아들 친구와 저녁자리를 가졌다. 당시 그 방송국은 사장과 노조 간의 갈등으로 제작 거부가 한창이었다. 짬을 내 저녁을 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님 저는 기자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은 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언론과 직접 안에서 본 언론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그 친구 녀석은 한숨을 쉬었다.

 

애정부터 익혀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녀석의 곤혹스러움이 귀엽기도 해서 잦은 농담을 했다. 그러나 역시 고민이 컸던 모양인지 “도대체 기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 말씀 좀 해 달라”고 했다. 그 녀석의 절실함 때문인지 취기가 올라서인지 그날 난 5가지를 말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애정을 가질 것. 항상 「왜」라는 의문을 달고 살 것. 따라서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질문을 할 것. 배움에 부지런할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5가지는 ‘애정’이라는 하나의 덕목으로 관통되어 있다. 사회에 대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면 시각이 달라지고, 시각이 달라지면 글 쓰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고에 익숙하면 할수록 애정은 비판의 방향을 긍정에 둔다. 그것은 기사를 받아들이는 독자가 가장 먼저 알게 된다. 아프지만 수긍하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나 최근 그 녀석이 다시 찾아왔다. 중앙일간지에서 수습딱지를 갓 떼고, 팽목항에 서 한 달을 보냈다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는 지 얼핏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언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녀석은 거기서 3부류의 기자를 봤다고 한다. 관련당국의 보도자료를 기다렸다가 베껴 쓰는 부류와 주변 취재를 한 후 보도자료와 짬뽕해서 쓰는 부류 그리고 자신이 취재한 것과 보도자료를 비교·분석하고 완전히 새로운 기사를 쓰는 부류였다. 마지막 기자들은 분초를 다투는 마감시간을 맞추기 위해 거의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며 그런 기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언론의 가치는 비판

 

권력은 그 속성상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하려는 강한 욕구가 내재돼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나팔수와 칼이 필요하다. 나팔수는 언론이고 칼은 검찰이다. 그러나 언론의 가치는 비판에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권력과 언론은 상반대 개념이다.

때문에 언론이 언론의 의무를 다하고자 할 때마다 권력은 그 이상의 압력을 가해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하거나, 권력의 일부를 던져줌으로써 길들여 왔다.

 

자성의 소리 반가워

 

나팔수란 그렇게 길들여진 언론을 말하고, 어용(御用)이란 단어는 그렇게 붙여졌다. 마약이 무서운 것은 처음엔 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한 번 맛들이면 헤어 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성을 마비시켜 선과 악, 양심과 비양심, 올곧음과 부정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로지 마약을 공급하는 이의 선택에 따라 움직여지는 상태에 빠진다. 체질과 정신력이 강하다 해도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번의 죽음도 겪어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허드렛일과 악역을 도맡은 현장의 어린 기자들로부터 자성의 소리가 확산됐다. 똥물을 뒤집어 쓴 경력기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새하얀 초년생 기자들의 눈엔 너무 명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초년병들에게는 의도적으로 무례함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주눅이 들어서는 올바른 취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도 또 다른 권력이고 갑(甲)의 입장이다. 몇 자의 글로도 사람을,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서 이다. 상대방이 무례하게 보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이 기자의 눈은 일반인들의 눈과 달라서다. 때문에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이들이 본래의 의무를 잊는다. 비판의 눈은 탐욕으로 바뀌고, 당당한 무례함은 갑질로 변질된다. 그들은 변명한다. 윗사람 탓이고, 회사의 탓이라고…. 그렇게 변명하는 순간 자신은 기자가 아니라 세일즈맨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안다. 「기레기(기자 쓰레기)」 말로 증폭된 자성의 소리는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이라는 허물을 쓰고 권력의 단맛을 찾아가는 가식의 무리들을 볼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솟구치는 메스꺼움은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날 헤어진 아들의 친구 녀석을 보면서 대견함과 함께 씁쓸함이 몰려온 것은 우리는 너무 깊게 권력이라는 마약에 찌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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