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홀로코스트’까지
지나친 의인화 때문에
육식을 비윤리로 규정
[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영국의 동물복지 활동가이자 작가인 루스 해리슨은 그의 저서 <동물 기계>에서 공장식 축산이란 무엇인지, 밀집사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 분야의 전문가 로윗연구소의 프레스턴 박사의 말을 인용해 ‘생산라인 방식의 축산’이라고 설명한다.
생산라인 방식의 축산이란, 빠른 전환율, 고밀도 비육, 높은 기계화 비율, 저노동, 판매 가능한 제품으로의 효과적인 변환, 이 다섯 가지가 이른바 밀집식 동물생산 시스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업자에게 생명은 너무나 하찮다. 수많은 동물을 도태시키는 일이 매일 일어난다. 도태시킨다는 것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동물을 제거하기 위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약한 동물을 죽이는 원칙은 처음부터 적용된다.
공장식 축산업자에게는 조상들이 해왔던 것처럼 동물을 대하면서 얻은 경험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달해 세대로 이어지는 지식이 쓸모가 없다. 공장식 축산업자가 기대는 것은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사료를 고기로 변환하는 데 가장 적합한 품종, 먹이, 환경을 찾기 위해 막후에서 컴퓨터를 돌리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다.
우리는 농부와 사료 제조업체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주요한 관심은 사료요구율일 뿐 자신들이 사용하는 약물이 소비자에게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가 아니다.”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제국의 외동 아들이면서 가업 이어받기를 거부하고 채식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존 로빈스도 “사람들은 동물들이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을 느끼리라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동물들이란 건 결국 ‘우리의 사용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물의 고통은 그저 단순한 감각으로만 여겨진다. 즉 동물의 통각(痛覺)은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인간들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교감하는 능력, 즉 사랑하는 능력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있다”고 강조한다.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런 주장들을 듣고 있다 보면 육식을 하는 입장에서는 뭐라고 대꾸할 말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육식을 하는 자체가 동물을 살육하는 행위 같고, 인간성을 상실한 것 같기도 하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신을 보면 나도 같은 동물로 격하된 듯한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동물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미국 뉴스쿨 대학에서 이스라엘과 세계 고전문화를 가르치는 작가이자 역사가 찰스 페터슨은, 심지어 가축이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독일 나치의 ‘최종 해결-나치의 유대인 절멸 계획’에 빗대기도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종차별주의는 동물들을 노예화하고 억압하고 살생해 왔다는 것이며, 그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시카고 식육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라고 지적한다.
나치는 유대인의 절멸계획을 수립하면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20세기 초 헨리 포드가 자동차공장에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학살 도구로 차용했다.
자동차 부품을 해체하고 뒤섞은 후 재조립하는 효율적인 이 시스템은 1890년대 초반에 도입된 시카고 스톡 야크의 가축 해체라인을 보고 착안했다는 점에서 가축이 축산물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이 ‘잡식 동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며 생물학적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인간의 윤리적 측면만을 강조한 그래서 인간들에게만 통용되는 윤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이 종차별주의를 불러왔기 때문에 이를 배척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같은 가치로 놓고 보면 그 ‘윤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 있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초식동물에 대한 육식동물의 습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셔널지오그래피의 작가들 또는 관광객들은 가젤, 뉴, 얼룩말들과 그 새끼들이 사자나 표범, 치타, 하이에나, 악어들에게 잡아먹히는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서도 관여해서는 안된다.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육식동물들이 초식동물들을 사냥해 배를 채우지 못하면 육식동물들은 살아갈 수 없다. 서로 먹고 먹히고, 잡은 먹이를 약탈하고 약탈당하는 것이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다. 먹이를 인간처럼 저장하지 못하는 것은 사방에서 천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의 먹이 사슬 중 최상위에 위치해 있다. 잡식동물인 인간도 먹지 못하면 죽는다. 육식을 비윤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생각의 비약이다. 동물학대적 가축 사육에 대한 축산 농가들의 자각도 진행 중이다. 축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