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그것을 표출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기쁘면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띠우고 화가 나면 표독스런 얼굴로 상대에게 겁을 주기도 한다. 
지금도 코로나로 노래방 가기가 자유롭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기분이 좋아지면 술 한 잔 걸치고 지인들과 함께 한 곡조 뽑으면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춤을 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춤을 통하여 협동의식을 고양하면서 생의 찬미(讚美)를 확인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결코 춤을 출 수가 없다. 농촌에서 풍농(豊農)을 기원할 때 춤을 추고, 어촌에서도 풍어(豊漁)를 비는 차원에서 의식적인 춤의 향연을 통해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춤은 의식과 무의적인 춤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때 철학자 장자(莊子·BC 369~BC289)는 아내가 죽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친구 혜시(惠施)가 평생의 반려자 아내가 죽었는데 곡(哭)을 하기는커녕 장단을 맞춰 노래까지 하는 것은 심하지 않으냐고 따졌다고 한다. 
그러자 장자는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슬픔을 거둬들인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삶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래 삶이란 없었다. 그저 허공을 떠돌던 기(氣)가 모여서 형체를 만들고 그 형체가 삶을 갖추게 된 것에 불과하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였던 기가 흩어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춘하추동이 반복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그렇게 통곡할 일이 뭐있느냐는 것이다. 
본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춤을 춘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꿀벌이 춤을 추는 것의 의미는 인간의 희로애락과는 다르다. 꿀벌의 춤 언어를 처음 해독한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칼 본 프리쉬 (Karl von Frisch)박사는 벌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는 그들의 의사전달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벌들은 곤충 세계에서 의사전달을 위한 가장 독특한 수단의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가 발견한 것을 보면 꿀벌은 단지 느낌이나 맛으로 뿐만 아니라, 춤추기로도 자신의 의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한 꿀벌이 어디서 꿀을 발견하면, 벌집에 돌아와서 다른 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데, 방향, 거리 및 꿀의 품질에 대해 춤을 추어서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인간은 춤이 희로애락의 표현이지만 꿀벌은 꿀의 장소를 알린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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