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동료들과 어울려 어디 맛집이라도 가서 음식을 먹을라치면 수저가 제대로 가질 않네요. 음식이 맛있는지 맛도 모르겠고…애들은 제대로 먹고 있기나 하는지…”
농촌에서 학업이나 여타의 이유로 자녀를 도시로 떠나보내거나, 해외로 유학을 보낸 부모들의 한결같은 심정이다. 늘 자신들의 품안에서 벗어난 자식 걱정에 전전긍긍이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하물며 그런 자식들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싸늘하게 주검으로 변한 자식을 대할 때 그들이 이야기하는 ‘하늘이 무너졌다’는 말은,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같은 부모의 입장으로서 무슨 뜻인 줄 안다. 

 

황망한 죽음의 슬픔


하지만 더 황당한 건 서울 한 복판에서 그것도 대통령실 근방에서 그것도 다른 재난도 아닌 걸어가다가 눌려 죽고 서서 질식해서 죽었다는 사실이 선 듯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 자식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설명해줄 정부의 안전책임자들은 한결같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말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만 끌다가 이 순간만 모면하면 될 것이라는 그 얄팍한 수작들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명명백백 참사의 과정과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슬픔을 정치에 활용하지 말라”며 ‘정쟁’으로 몰고 간다. 
이들에게 부모의 심정을, 사랑하는 사람을 황망하게 떠나보내는 슬픔의 의미를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누가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는지는 대다수의 국민은 알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도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불쌍하고 어이없을 뿐이다.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실·대통령비서실·경호처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태원 참사 대응과 관련 질의를 하고 있는 와중에 김은혜 홍보수석과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이 ‘웃기고 있네’라고 필담을 나누다 퇴장당하고, 그들을 퇴장시켰다는 이유로 국민의힘 주호영 대표가 윤 대통령의 ‘진노’를 샀다는 전언은 이 정부가 어떻게 참사를 대하느냐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의 애절함은 당한 이들만 안다. 
장례를 치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당장은 황망함에 어쩔 줄 모르지만 그 시간이 지나 어수선함이 지나고 나면 그리움이 몰려오고 그리움이 뼈속으로 파고들어 온몸이 곪는다. 
방바닥을 긁어대다가 자신의 몸을 피가 나도록 긁고 죽어갔던 이들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정신까지 파괴된다. 
이태원 참사의 사망자는 현재 158명이지만 그보다 3배 4배 많은 가족들과 친지들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장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들은 알까?
윤석열 대통령은 그간 국민의 생명 안전 보호를 제1의 책무로 강조했다. 지난 2월 7일, 대선 후보 당시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첫째 임무이기 때문에 국가를 끌고 가는 사람은 밤잠 안자고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정복고의 착오성


하지만 최근 국가안전관리시스템 점검회의 자리에서는 "아무리 최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완벽한 매뉴얼을 준비했더라도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신속하게 전달, 공유되지 않으면 적기에 필요한 조치가 실행될 수 없고 이러한 비극은 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현장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 시간 구급활동에 몰입했던 소방대원과 경찰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대형 참사를 참사라 하지 않고 사고로 처리하며 관제 애도기간을 정하고, 보상과 장례처리비용 등 금전적인 대책부터 처리하고 보는 이 정부를 볼라치면 이 정부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하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동물들이 연대해 파업을 일으켜 농장주를 쫓아내고 일시적 해방을 이뤘을 때 그 맨 윗자리를 차지한 돼지는 사냥개를 길들여 자신의 의도와 반대된 세력들을 하나하나 처리한다.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풍자한 이 소설은 100년이 넘었지만 미래의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윤석열 정부의 6개월 행보를 보면 마치 프랑스 대혁명으로 전제 군주체제의 구체제가 무너지고 유럽에 자유·평등의 물결이 거세게 일자 이를 무서워한 국가들이 앞장서 이를 무너뜨리려했던 왕정복구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전국에 곳곳에서 켜졌던 촛불의 무서움을 잠재우기 위한 구체제의 반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촛불의식 속에 시민들의 의식이 얼마나 뛰어났던 지를, 국민들을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대통령이 좌표를 찍어주면 사냥개들이 몰려들어 물어뜯어 봐야 더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이다. 
레지스탕스 투사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3곳의 수용소를 전전한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스테판 에셀이「분노한 사람들에게」에서 분노와 참여를 함께 호소했다. 비폭력적이고 사려 깊은 행동을 옹호했다. 
대한민국의 우리는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한 현대 지성인들이다. 이전의 방식대로 북풍으로 국민들의 시야를 가리고, 언론을 통제해 현실을 왜곡한다 해도, 21세기 대한민국은 저들만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