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고 그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미국의 어떤 연구진에 의하면 사람들은 하루에 오만(50,000)가지 생각을 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오만가지 생각이라면 엄청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쓸모가 있기도 하고 쓸모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요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집중하기 좋은 때는 잠들기 전(前)하고, 잠에서 깨어난 바로 직후(後)다.
아마도 머리에 잡념이 없고 깨끗할 때가 그 시간이다. 자신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면 심신이 청정해지고 생각이 맑아진다.
하루라도 착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모든 악(惡)이 저절로 생겨나고 사람은 하루라도 기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한 기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생각이 긍정적이고 맑은 생각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중국의 당나라 때 왕유(王維·699~769)라는 시인은 안서(安西)로 가는 친구 원이(元二)를 송별하는 시(詩) ‘송원이사지안서(送元二使之安西)’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위성(渭城·원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咸陽)의 아침 이슬비가 마당을 적시는 듯 마는듯하고/ 객사에 늘어진 버들잎은 그 푸른빛이 더욱 새롭구나/ 나아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한 잔의 술을 권하노니/ 양관(陽關)을 나서 서쪽으로 떠나면 거기엔 아는 이 아무도 없잖은가.”
떠나보내는 친구에게 술 한 잔 권하는 진한 우정이 물씬 배어있고, 비 내린 아침에 버들잎이 새롭게 빛나는 광경과 서쪽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속삭이는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연상이 되어 진다.
왕유 시인의 시가 한 폭의 그림이고 그림이 곧 한 폭의 시로 연상케 되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시상이 풍부하고 시인의 독특한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그려낼 수 없을 것이며,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힘이 깊고 내밀하지 않으면 결코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동파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은 소동파가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시가 한 폭의 그림으로 연상되도록 쓴다는 것은 시인의 정밀한 스케치가 필요하다.
아마도 시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자체가 시다. 또한 시는 그림이며 우리네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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