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전날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른 아침 출근을 하면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 있는 먹거리가 라면이다. 주변에 일찍부터 라면을 끓이는 곳이 없어 언제부턴가 편의점을 찾아 컵라면을 즐기게 됐다.
편의점 주인이 전자렌지에 컵라면을 데우면 더 맛있다는 권유에 그대로 실천했다가 그전에는 가는 면발이 싫고, 숙취 해소에 제격인 국물만 마셨지만 이제는 아예 마니아가 됐다.

 

관행적 사고 틀 깨야


하지만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진 겉비닐을 떼어내는 일이 아주 화를 돋우었다. 손톱이 조금 길 때는 그래도 튀어나온 비닐을 잡아떼면 그만이었지만, 손톱을 깎은 날에는 짜증까지 나기 일쑤였다. 
어느 날 페친 중 한 사람이 컵라면에 관한 일화를 적으면서 계면쩍게 웃고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그 페친도 컵라면 뜯는 것이 매우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하루는 컵라면을 뜯다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이 “아빠, 바보 아냐?” 하더란다. 뭔소린지 몰라서 딸을 쳐다보는데, 컵라면을 빼앗더니 단번에 뜯더라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지 알았다면서 웃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겉비닐 아래 부분에는 컵라면 용기와 비닐 사이의 공간이 있는데, 팽팽한 만큼 손가락으로 조금만 눌러도 터지는 것이었단다. 왜 여태 그걸 모르고 비닐을 뜯을 때마다 화를 냈는지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 페친의 사연을 읽고 난 후부터 컵라면을 뜯으면서 내던 신경질이 사라지고, 페친을 생각하며 웃는다. 그리고 관행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쉽게 이해가 됐다. 수학문제가 그렇듯 답을 알고 나면 쉽지만, 알기 전에는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는 조금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소한 것에서 깨닫게 됐다.
이러한 관행적 사고방식은 어쩌면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확산되고, 그 확산은 자신이 소속된 가정과 조직과 국가의 경영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이고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이분법적 논리 역시 20세기적 사고방식이다. 세분화된 사회에서는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이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주어진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주 단적인 예로, “공산주의가 나쁘기만 할까?”나 “민주주의가 좋기만 할까?”라는 의구심만 표출해도 과거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의 입장에서는 답이 뻔하다. 하지만 지금 주류로 등장한 MZ세대의 답은 다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 프레임 짜기를 좋아하는 부류는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 공산주의자가 된다. 애초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함께 잘 사는 사회의 지향점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지금 한국의 사회다. 
정치도 그렇다. 국가를 어떻게 발전시켜 그 안의 국민들의 삶을 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가라는 목표는 내팽개치고, 상대편을 흠집 내고 어떻게 하든 엉망으로 만들어 그 대안으로 자신들을 선택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이제는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말 다르고 행동 달라


그러니 무슨 개혁을 한다고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달라고 호소해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설레발(?)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개혁이란 말 그대로 완전히 분해해 다시 짜맞추는 일이다. 거기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셈법이 숨어있으면 가당치 않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검찰을 개혁한다니 검찰들이 난리고, 언론을 개혁한다니 언론사들이 난리다. 국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으로 보루인 검찰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명언으로 만들고, 언론사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외국의 사례들까지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는 대목만 취사선택함으로써 여론몰이에 무진 애를 쓴다.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다.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의 필연적 고통이라면 후대들의 미래를 기대하면서라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혼란을 누가 개혁의 전개과정이라고 수긍할 수 있을까.
정부 정책은 다 가관이다. 탄소중립을 내세우면서 가축들이 내뿜는 메탄가스가 어떻고, 가축분뇨의 암모니아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결과적으로 기후 위기를 만들어낸다며, 축산농가를 비롯 산업 종사자들의 탄소중립 정책에 적극적인 참여를 강요해 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기후 위기를 초래해 왔으며, 지금도 해 오고 있는 화석연료에 대한 제지나 억제는 불과하고 오히려 석탄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5년 전 영국 환경단체인 <기후행동추적>으로부터 ‘기후악당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상황에서의 행동으로는 무식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얼마 되지도 않는 가축에서의 배출 줄이기로 화석연료의 온실가스를 메꾼다는 의미가 아니고 뭘까? 적당히 말로 때우고 시간이 흐르면 잊혀져 왔던 과거의 답습이다. 
점점 뜨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를 죽이는 건 지금 당장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아니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물 안에서도 앞으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개구리를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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