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도 없는 나라에서의 필수적 생존전략은 수출’이라는 슬로건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시는 ‘보릿고개’의 아픔을 겪지 말자고 머리카락에서부터 심지어 오줌까지 해외로 수출했던 일은 그리 오래된 해프닝이 아니다. 
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의 발전 전략을 그대로 밟지 않고 압축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을 부정한 채 경제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실은 경제대국 앞자리에서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냥’ 형태로 보상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오랜 시간 사회적 갈등과 반목 속에서 화해해온 정상적인 과정을 뛰어넘었다는 자부심을 채우지 못한, 좌절감에서 오는 것들이다. 실제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는 ‘부실 칼로리’를 구별하지 못한 성급함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흰 밀가루와 설탕, 정제된 가공식품들, 알콜 등은 우리를 살찌우게 하고, 일시적으로 연소시킬 열량까지는 주지만, 영양소란 면에서 보면 거의 주는 게 없다. 이런 부실 칼로리 위주의 식사는 ‘영양실조’라는 대가를 치른다. 
우리는 여지껏 최단 시일 내에 유럽과 북미인들과 겨룰 수 있는 가장 큰 덩치를 원했다. 크기가 클수록 좋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영양학적으로 보면 과정을 무시한 인위적 빠른 성장은 짧은 수명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수출지상주의 속에서는 수출하지 못하는 또는 공익적 가치와는 별개로 외국산과 경쟁력이 없는 많은 산업들은 된서리를 맞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산업 간의 갈등은 물론 어느 산업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불평등의 격차를 더 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 국제무역이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한 국제무역의 창시자인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주장한 상호 이익에 바탕을 둔 ‘비교우위론’처럼 순진한 협상은 없다. 교역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이 공유될 리도 없기 때문이다. 
농업이든 그 밖의 산업이든 한 국가 내에서의 산업이 고르게 발전하는 것이 ‘균형 발전’이다. 우리는 언제나 수출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농축산업을 제물로 삼아오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참아야 한다”고 강요해 왔다. 
그리고 농축산인들이 “생존권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마치 ‘떼쓰기’로 폄하하고, 마지못해 그때마다 ‘동냥’의 형태로 보상금을 지불한다고 생색내기에 바빴다. 
새해 벽두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으로 우리가 농축수산물의 관세 철폐를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이해되지 않는 조항이 한 둘이 아니다. 금융과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이동 자유화는 물론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 금지 조항을 우리가 채택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뭘까?
1989년 미국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남미 등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혁처방을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뜻하는 말이다. 

 

응당 받아야 할 권리


이 전략의 요점은 모든 공기업의 민영화, 외국 회사의 진입을 막는 장벽 철폐, 정부의 사회보장에 대한 지출 삭감이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이 이러한 기조를 채택할 수밖에 없도록 앞장서서 추진한 기관이 바로 세계은행과 우리에게 악명 높은 IMF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반세계화 진영을 이끄는 진보적인 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이들의 악행을 ‘쇼크 독트린’이자 재난을 당해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틈타 이윤을 챙기는 ‘재난 자본주의’를 창시했다고 말한다. 
농축산인들의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시장 자유화에 울화가 치밀겠지만, 새삼 무엇을 위해 강요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울화가 아니라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세계은행과 IMF가 어떤 짓을 해왔는지를 알게 되면 말이다. 
‘자유화’를 부르짖는 자유시장 제일주의자들은 국가의 부를 앞세우지만, 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 외에는 관심도 없다. 국민들에게 값싼 농축산물이나 공산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 대가는 국내 농축산업이나 중소제조업체들의 몰락이다. 
우리가 눈앞의 값싼 외국산 제품들에 현혹되어 막무가내로 구입하던 시대도 지났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구태에 찌든 정책 결정자들이나 대기업과 결탁한 매판자본주의자들 뿐이다. 
구시대의 유물들을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콘크리트 집을 짓는 것이 발전이라 여겼던 19세기 발상을, 많은 국민들은 더 이상의 발전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수출로 쌓인 국민 일인당 GDP의 3만불 시대에도 기뻐하지 않는다. 
평균의 허점을 우리는 이제 알기 때문이다. 간단한 수학의 기교일 뿐이다. 부자와 빈자의 비율이 7대 3이든 9대 1이든 두 합의 나누기는 5임을 안다는 뜻이다. 빈부 격차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GDP가 무슨 소용일까. 
농축산업의 희생을 통한 시장 자유화가 모든 국민이 부유해지는 길이라면 그 대가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냥이 아니라 응당 받아야 할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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