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정말 알고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모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일까? 한 세대의 또는 한 정권의 평가를 그 시기만을 떼어 놓고 평가할 수 있을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들이 쏟아진다. “이게 나라냐?”부터 “못 살겠다, 갈아보자”까지. 이런 말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상 들리던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고통에 앞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트집 잡기다. 
불은 발등에 떨어져 발이 타들어가는 데 누가 불을 질렀느냐고 서로 ‘네 탓’ 타령이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적은 ‘조선이 망하던 날의 일상’을 보면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어쩜 그렇게 똑같을 수 있는가에 혀끝이 차다.  

 

양반의 착취가 원인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망하던 날의 일기다.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5년 뒤 대한제국은 명목상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최린은 조선이 망하던 날 남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목격한 거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거리를 살펴보니 각 상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오백 년 왕국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이날에 이렇게도 평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상한 감상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 민족은 특별히 애국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에 이 원수의 날을 평온하게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맞이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우선 간단한 이유로 조선은 원래 왕국이 전제정치인 동시에 귀족의 계급정치였다. 
더구나 그 종말의 난정(亂政)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정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민중은 이날을 국가가 망한 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이 망한 날이라고 보는 편이었고, 조선이 망한 뒤에는 그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반 평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중류 이상 인사들로 말하면 어느 누가 뼈에 사무친 망국지한(亡國之恨)이 없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부터 두문불출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비통했다. 나라는 이미 망했고, 과거의 모든 희망도 꿈으로 화하고 말았다.”
여기서 최린은 중류 이상의 인사들은 망국지한이 없겠느냐고 했지만 “나라를 팔고, 백성을 등치고, 호위호식한 사람들이 백성이었을까?”의 의문에 이르면 시쳇말로 만만의 콩떡이다. 우리는 약고 약해빠진 성리학에 물들고 토씨 하나 가지고 맞다 틀리다로 날을 새우던 식자층들의 오만을,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지켜보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부터 개발경제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대런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를 쓴 정병석 전 노동부 차관은 백성을 완전히 노예취급한 양반의 착취가 그 원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지독한 진영의 갈등은,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이들이 불씨를 제공한 것들이고, 그 불씨를 확산시켜야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득의 폭을 더 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 바라보는 눈을


게으르고 약삭빠른 언론에서부터 인터넷 매체들까지 합세하면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는 일반인들은 조장된 여론에 함께 휩싸이며 흥분한다. 
일부 매체들은 음모론을 슬쩍 퍼뜨린다. 그들이 퍼뜨리는 음모론은 그럴듯한 자료들을 인용하지만 그 자료들은 악의적 편집을 한 후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전문가들의 심사를 받거나 엄격한 검증을 받은 것처럼 꾸며지지만, 이를 구별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은 구분할 능력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 교수이자 미국 민주주의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는 마이클 콜필드는 크게 4가지의 ‘디지털 문해법’을 제시했다.   
첫째, 소셜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장들이 틀렸다는 걸 밝히려고 이미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것. 둘째, 소문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라. 그 주장을 가장 먼저 제기한 글이나 사진을 찾아내라. 
셋째, 그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라. 객관적이라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 최초의 글이나 관련된 웹 사이트와 언론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 사람이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믿는 계층이 얼마나 다양한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서도 답을 얻지 못했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더 나은 검색 방식과 전략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론에서 하는 말과 글을 거의 진실로 믿어왔다. 사회에 그늘진 또는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고, 권력의 남용을 명명백백 드러냄으로써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리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고 끊임없이 위기를 조장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무지하다. 그들에게 반대하면 흥신소 마냥 신상을 털고 작은 흠집이라도 잡히는 날에는 거의 매장 수준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인공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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