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경제신문 권민 기자] 가축을 의인화하는 극단적 채식주의자들의 축산인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두고, 그것에 흥분하면서 ‘인간이 가진 본성과 DNA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반박을 하고, ‘자신이 생명을 존중하는 숭고하고 존엄한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것은 축산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사랑스럽고 귀여운 콩나물과 새싹들의 머리를 잔인하게 참수해서 잡아먹는 야만인’이라고 함께 삿대질하는 것도, 어느 날 느닷없이 동물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야만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에 대한 황당하고 억울함의 반발임에는 틀림이 없다. 

 

‘분노조장’ 할 일 아냐


하지만 식자층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이, 축산인들을 대변한답시고 앞장서서 똑같은 방식으로 축산인들을 선동하는 폼새는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지경이다. 먼저 흥분해서 왁왁 거리고, 그에 호응하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또 악을 쓴다. 
스스로도 성심성의껏 가축을 돌보고 그것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업’에 종사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오던 어느 날 갑자기 ‘돈을 위해 살생하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동물의 고통을 모르쇠하고 그것으로 죄업을 쌓는 비인간’으로 대접받는 축산인들의 심정은 복창이 터질 일이다.  그들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칭 전문가이고, 축산을 공부하고, 축산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저들’의 논리에 똑같이 대응할 일이 아니다. 저들의 축산 폄훼의 움직임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축산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DNA에 인류는 이미 육식동물로 정해져 있다’느니, ‘인간도 한낱 육식동물에 지나지 않다’느니 이상한 논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특히 ‘축산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농업에서 흡수하고 있으니 별문제 없다’는 논리는 해괴하다.
성 소수자나, 장애우나, 여성의 인권문제를 다룰 때도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인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듯 축산의 문제 역시 범인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서 인간이 육식동물이라고 규정했다면 말이다. 
아무리 극단적 채식주의자들을 비롯 환경보호론자들이, 육식하는 행위가 인간의 입맛을 위해 삼림을 황폐화하고, 수자원을 고갈시키고, 토양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고 한들 육류는 거부하기 힘든 영양에 필수적인 음식이다. 
축산업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정적 시각은 축산업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잔혹한 가축의 사육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그러한 방식을 인지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은 대부분 낡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동물복지가 유행되면서 번역되기 시작한 서적들은 공통적으로 잔혹한 사육방식을 중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일부는 더 나아가 그 때문에 육식을 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알만한 저자와 저서들을 소개하자면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 이노우에 교스케(井上恭介)의 ‘소고기 자본주의’, 찰스 페터슨의 ‘동물홀로코스트’, 그릭 크리처의 ‘비만의 제국’, 폴 로버츠의 ‘식량의 종말’ 등이고 이들이 제기하는 잔혹한 사육방식은 개선되기 이전의 것들이 태반이다. 

 

결국엔 단편적 해결


특히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루스 해리슨의 ‘동물기계’는 1964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고전이다. 이 시대와 21세기의 현실은 너무 차이가 나지만, 극단적 채식주의자들이나 동물보호단체에서는 현재의 사육방식으로 착각한다. 
가장 단적인 예가 식육용 송아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사육방식은 이미 금지된 상태이지만 당시에는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까닭에 유행했던 방식이다. 그 사육방식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너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어, 잘못하면 모든 축산농가가 모든 가축을 그와 비슷하게 사육하고 있는 줄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배터리 케이지로 닭을 키우는 방식 등 대다수는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축산업의 사육방식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때문에 축산업을 폄훼하는 이들의 이상한 논리도 완전히 틀렸다고 반박하기 어렵다. 
여기에 최근 ASF나 AI 발생 등 악성가축전염병의 발생까지 들이대면서 축산업을 다시금 옭죈다. 축산인의 입장에서는 가축전염병의 발생으로 물질적 손실에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이중삼중의 고통이다. 축산인 외 그 누구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모든 원인이 저들의 주장처럼 축산인들의 부도덕한 사육방식에 있는 것일까? 천박한 소비자들의 소비패턴이나, 먹을거리에 대한 ‘문맹’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자체의 탐욕스러움 때문은 아닐까?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의 극단적 주장에 축산인들이 극단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축산업 자체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리적 근거에 입각한 ‘설득’과 ‘이해’의 과정이 중요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자리도 필요하다. 
내가 생산하는 축산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비자가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축산업에 국한해 문제의 폭을 줄이면 결국 단편적인 해결방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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