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는 단연코 퇴계 이황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을 꼽는다. 그들은 주자학의 양대 산맥으로 조선조 양반사회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의 존칭으로, 그가 완성한 학문이 주자학이다. 
주자학은 고려 말 안향(安珦:1243~1306)에 의해 전래된 이후, 조선말까지 500년 넘게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흔히 내세에서 보상받기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면 성리학에서는 현세에서의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하늘의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자는 천리(天理)가 바로 인간과 만물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성품이 곧 천리(天理)로보고, 인간을 작은 우주로 여긴 것이다. 
다만 천리(天理)가 잘 발휘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氣)라고 설명한다. 기(氣)는 감정과 욕구로 사람이 잘못되는 것은 바로 이 기(氣) 때문이다. 
주자학에서는 공부와 수양을 통해 기(氣)를 바르게 변화시키면 자신에게 부여된 천리(天理)를 잘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자학의 대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 1501년 경북안동에서 태어나 단양군수, 풍기군수, 대제학 등을 지내고 말년에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다 1570년에 운명 하셨다. 450년 전에 70세까지 산 장수비결은 ‘활인심방’을 집필하고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중화탕(中和湯)은 마음을 다스리는 처방으로 일명 만병통치약으로 예를 들면 “대자연의 도리에 순응하라(순천도順天道)”, “마음을 맑게 하라(청심淸心)”, “부드럽고 순하라(유순柔順)”, “만족할 줄 알라(지족知足)” 등 30가지의 방편이 그것이다. 
실천적 주자학의 그루(Guru: 최고의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번 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쓴 꼿꼿한 선비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해 밤에도 정신을 흐 트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조식은 선비이면서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칼에는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을 의(義)’라고 새겨져 있었다. 주자가 주장한 경(敬)이 갖는 참뜻은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고 했고 그것을 실천한 이가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이다.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두 거두가 후세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조식선생은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라고 조언하고 이황선생도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라고 후세에게 경책한다. 두 분의 현자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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