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인류학자의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호모 엘렉투스의 두뇌는 이전보다 거의 세 배에 달했지만 신체 크기는 두 배에 못 미쳤다. 인간의 신체는 매우 큰 두뇌에 상대적으로 작은 장기로 연료를 공급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고기가 정답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고기가 식물보다 단위당 열량이 높을뿐더러 소화도 쉬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비싼 두뇌이론’의 공동저자인 고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는 선조들이 고기를 더 먹고 식물을 덜 먹었기 때문에, 그 모든 식물 성분을 모조리 소화하기 위한 커다란 내장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고 한다. 

 

육류 기여도는 모르쇠


동물성 음식을 주로 먹지 않았다면 이들 신체와 두뇌가 커질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신체와 두뇌가 이렇게 크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중동, 아시아 나아가 유럽까지 매우 빠르게 뻗어나간, 도구를 다룰 정도로 총명하고 능숙한 수렵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로마뇽인이 수렵에서 얻은 열량은 시간당 1만5000칼로리로 그들의 선조보다 훨씬 높았다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이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크로마뇽인도 식물, 곤충, 과일, 꿀 등을 찾아다녔지만 전체 열량의 3분의 2를 동물성 음식으로 채웠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대체로 수긍한다. 
고기가 인류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느끼는 것이다. 특히 스포츠에서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과 경쟁하면서 아시아인들이 겪었던 열등감이, 고기를 보충하면서 희석된 것처럼 말이다. 
비건이든 베지테리안이든 모든 채식주의자들은 각종 심장질환 등을 일으키며 ‘풍요의 질병’이자 전염병으로 일컬어지는 ‘비만’의 원인으로 육식을 예로 들지만, 사실 그것은 과다한 섭취가 원인이지 고기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이들은 윤리적 소비를 내세우며 축산업을 ‘살생’의 산업으로 매도하고 공격한다. 급격한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축산업을 꼭 집어낸다. 지금 현대인의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그만큼 건강해진 것은 의료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인체의 고른 성장을 돕는 양질의 지방과 단백질을 제공하는 고기의 기여도는 아예 거론조차 안한다. 
오히려 축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동물을 학대하고, 함부로 살생해 사람들에게 해로운 식품을 공급하는 ‘악인’으로 비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윤리적 소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스위스의 사회학자이자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이었던 장 지글러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했다. 소비사회는 그 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위해 풍요라고 하는 것을 창출해냈고, 소비자들은 상품에게 영혼을 파는 셈이라고 했다. 
산 것을 버리고 또 다시 최대한 많은 양의 상품을 사들이도록, 필요하지 않아도 자꾸 새로운 상품을 사도록 부추김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윤리적 소비라고 생각하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기를 끊는 것도 마찬가지다. 축산업을 친환경적으로 바꾸라고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매도하는 행위를 윤리적 소비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일방적 매도 없어야


오늘날 기업들이 자본을 축적하고 축적된 자본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혁신적인 제품을 생산한다고 찬양받는 그 제품들조차 ‘윤리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기까지에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최근 유니세프에서는 중남미나 아프리카 등지의 광산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10살 내외의 어린이를 착취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왜 어린이가 착취당하는지 그들의 노동으로 우리가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손에서 결코 떨어뜨리지 않으며, 편리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휴대폰이 바로 저들 10살 내외의 왜소하고 어린 아이들의 노동착취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면 믿을까?
외따로 떨어진 광산 지대에서 민간기업들의 용병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휴대폰 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콜탄을 채취한다. 오늘날 콜탄은 금과 은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비행기 동체는 물론 우리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수많은 물건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광산의 암석은 부서지기 쉬워서 낙석이 빈번하다. 또 갱도가 너무 좁아서 몸이 마른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다. 어린 아이들이 산채로 매장되거나 질식사하는 사고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때문에 광산 소유주들은 수시로 어린 노동력을 찾아 나선다. 인근의 어린 아이들은 그 광산의 무서움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에 인력 보급 담당자를 따라나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휴대폰을 사용하는 이들을 ‘살인자’ 내지 ‘살인 동조자’ 또는 ‘방조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같은 예를 드는 이유는 축산업을 오염산업이라고 말할 때에도 보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 하는 용기는 필요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매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