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주변 공원을 산책하는데 나비 한마리가 혼자 날다가 꽃잎 위에 살포시 앉는다. 주말에 남한산성을 등산하는데 정상에서도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나비는 약 2만 여종에 이른다고 하며 아름다운 나비들이 예쁘게 춤을 추며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나비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각자 살아가고 있다.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면서 자기가 원하면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비는 분명 높이 평가할만하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장자 (莊子:BC369~BC 289년)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기분 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자인 줄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변함없는 장자였다. 
도대체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건지 알 수 가 없었다. 
장자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꿈에 나타난 게 아닐까. 장자는 부인이 죽었을 때 처음에는 슬피 울다가 나중에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친구가 노래를 부른 이유를 묻자 장자는 부인의 죽음이 생명이 변해서 죽음으로 간 것이고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처럼 반복적 자연 순환과정으로 울고불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참으로 고차원적인 철학자 얘기로 들린다.
일찍이 중국의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고 불리 우는 이태백(李太白:701~762년)도 “하늘과 땅 사이는 만물이 깃드는 주막이요 / 시간은 백대(百代)를 두고두고 지나가는 나그네이며 / 그 가운데 사람의 일생은 한바탕 꿈같은 것” 이라고 시를 읊은 바 있다. 이태백은 인생을 크게 한 번 꿈꾼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시성(詩聖)인 두보(杜甫:712~770년) 또한 태양과 달은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고, 하늘과 땅은 부평초 같다고 노래한 것을 보면 웅대하고 기개가 큰 천지에 인간의 나약함과 짧고 덧없는 인생을 천재시인은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노래하고 있다.
400년 전 스페인의 위대한 소설가 세르반테스(1547~1616년)는 돈키호테에서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 견딜 수없는 고통을 견디며 /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며 꿈을 예찬했다. 
또한 우리와 함께 20세기를 살다간 성녀 마더테레사 수녀(1910~1997년)도 인생은 낯선 여관에서 하룻밤 자는 거와 같다고 말한 것을 보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한낮 꿈에 불과하다. 
나비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자유스러움은 꿈이 아닌 현실이요 인간은 날지 못하는 무거움으로 가볍게 날아다니는 나비로의 환생을 꿈으로 그려보는 실존에서 고민하는 존재이다. 
죽음 앞에서 아무 도 자유롭지 못하다. 올 때는 정해져 있지만 갈때는 순서가 없어 더더욱 소중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니겠는가. 현재에 충실 하는 것이 인생을 보다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원천이 아닐까.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