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가정을 꾸리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 니들은 모를 거야.” 
이제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부모님이 자식을 앉혀놓고 진지하게 훈계를 한다.  
하지만 술 한 잔만 걸치면 늦은 단잠을 깨우며 늘 하던 말이 아버지의 넋두리였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듣게 되면 듣기 싫은 법이다. “아이, 또 왜요?” 졸린 눈을 부비며 언제부턴가 대꾸는 퉁명스럽게 변했다. 
아버지의 말을 빌리면,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고, 조금씩 모은 돈으로 닭을 키웠고, 돼지를 그리고 지금의 한우농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나이따라 생각달라


아버지를 기억하면 늘 일하는 뒷모습만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엔 가끔 그런 아버지와 옆에서 묵묵히 일을 거드시던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동참하고 싶어 아침 일찍 꼴을 베기도 하고, 축사 청소도 했다. 
아버지는 때가 되면 소를 팔아 학비를 대고 도시로 나가 학교를 다니라고 등 떠밀며 하숙비까지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너는 좋은 대학 나와 보란 듯이 살아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그의 당부대로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니며 학비와 매달 보내온 생활비를 허투루 쓰진 않았다. 당시 대학에서는 농촌 출신의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대학 자체는 ‘우골탑(牛骨塔)’, 즉 농촌의 가난한 농부들이 소를 팔아 지은 건물로 불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부모님의 바램대로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넋두리는 자연스럽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아이가 커가는 순간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이에게 빗대서가 아니라, 자신의 나이에 비례한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철없던 10대에서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던 20대, 부양할 가족이 생긴 30대, 자식의 뒷바라지로 등골 휘던 40대….
그렇게 나이가 들고 삶의 고달픔을 알아가게 될 때쯤 아버지에 대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도심에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 홀로 지내오며 수도 없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았다. 우리 아버지가 은행원이었으면 또는 번듯한 도심의 직장인이었으면…. 못 배운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하기 보단 원망이 앞섰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진 얼굴 그리고 새카맣고 굵고 상처난 손. 반가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서 “왜 오셨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는 “껄껄껄” 헛웃음으로 난감함을 대신하셨다. 
학창시절부터 아버지는 시골에 오지 못하게 했다. 방학이라도 시간을 쪼개 공부해서 아버지 같은 일을 대물림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좋았다. 가봐야 소똥이나 치고 축사 울타리 고치고 풀 베고 거의 매일 같은 ‘중노동’의 반복이었으니 안 그래도 핑계를 대고 싶었을 때였으니까.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당구를 배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배우고 공부를 핑계로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 도시의 아이들과 마치 나도 도시인인 듯 촌티를 벗고자 사투리를 고치고 행동거지를 배웠다. 
돈이 떨어지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시골에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는 늘 “사내자식은 괜찮다”며 편을 들어주셨다. 아버지는 말 그대로 ‘봉’이었다. 이래도 그래, 저래도 그래였다. 
그렇게 고향과 떨어져 살면서 무늬만 농부의 자식이었다. 산나물 이름도 들에 핀 꽃이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정작 농촌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 오랜 시간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도 못했다. 
 

언제나 뒤늦게 후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문상객들이 잦아든 새벽 홀로 우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함께 울기는 했지만 솔직히 아버지에 대한 뼈저린 그리움은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버려두었으니 감흥에 젖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오시고서도 소가 염려된다시며 곧바로 내려가시자고 보채셨던 분. 어쩌다 한 번 볼라치면 “밥은 먹었니?” 외엔 별다른 대화도 없으셨던 분. 마지막 유언이라면서 “불쌍한 네 어미를 부탁한다”고 하셨던 분. 
염(殮) 하면서 처음으로 조그마한 그리고 백지장처럼 차갑고 하얀 아버지의 알몸을 보면서, 온몸이 멍들고 찢어졌던 상흔들로 가득한 속살을 보면서, 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거림으로 눈물이 터졌다. 
“아 이렇게 사셨구나.” 거친 삶의 상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음을 알았다. 편한 나의 삶이 아버지의 고단한 삶의 대가였던 것을. 어머니는 상을 모두 치르고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왜 자식은 항상 늦게 그것을 깨닫는 것일까?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3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데 그것을 알기까지 우리는 30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귀가하면 아들은 언제나 별 말없이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 이젠 그때마다 뭔가 서운함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것은 자식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후회와 그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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