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길가에 차를 대놓고 젊은이와 어르신 사이에 고성이 오고가고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너는 에미 에비도 없냐?” “아니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전후 상황을 들어보니 가벼운 접촉사고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오고가는 말이 황당하다. 
분명 나이 지긋한 분이 부주의로 앞차를 추돌해 차를 세우고 책임을 가리는 것이었는데, 돌연 책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게다가 구경꾼이 몰려드니 나이든 분의 목소리가 더 커졌고, 젊은이는 거의 따지지도 못하는 입장이었다. 

 

‘경륜’은 변명에 불과


TV 예능프로에 나와서 한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한 번씩을 겪었다는 황당함이 바로 나이에 대한 것이었다. 
유교문화가 뿌리 깊은 아시아권의 많은 나라들은 ‘노인공경 사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심하다는 것이다. 처음 만남에서부터 신상을 턴다. 혈연에 지연에 학연에 뭔가 공통된 점이 없는가를 찾고, 나이를 따진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이나 누나다. 그에 따른 대접받기를 당연시한다. 개인적인 만남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싫으면 안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노년층의 ‘막무가내’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특히 권력의 중심에 서본 이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날 줄을 모른다. 아집과 오만에 쌓여 젊은층을 마치 아들 대하듯 훈계를 일삼고,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너희를 위해서”라고 오히려 역정이다.
“살아보면 이 방향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둥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둥 자신들의 방향을 강요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이 살아가야 할 세계는 오로지 그들만의 세계다. 
젊은이들이 실패해야 할 기회조차 빼앗으면서 자신들의 방향이 맞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아집이다. 다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그것은 틀린 그리고 잘못된 삶”이라고 ‘지적질’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소위 ‘꼰대’라고 한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짓을 두고 ‘Latte is horse.(라테는 말이다)’라고 비야냥 거린 지 오래다.  
4‧15 선거로 용도 폐기된 한 정당은 마지막 용트림으로 80대의 정치 기술자를 모셔온다고 난리다. 자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국민들에게 또 한 번의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무대에서 더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는 그를 모시며 내세우는 것이 바로 ‘경륜’이다. 이 경륜은 무대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의 변명이다. 그들은 ‘늙은 노새’ 이야기를 차용하길 좋아한다. 
여러 종마와 늙은 노새를 데리고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두 갈래 길에 서서, 도무지 어떤 길로 가야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설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이 들고 힘이 없어 전혀 쓸모가 없을 것 같던 노새가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창조적 파괴’의 의미


늙은 노새도 쓸모가 있다는, 늙은 노새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데, 역으로 말하자면 그 늙은 노새 때문에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앴다는 교훈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세대에는 그들의 방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무대가 아니다. ‘새로움’은 ‘창조적 파괴’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노인은 젊은이들의 하는 짓이 마땅하지 않다. 자신들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자신들이 무대에서 사라질 때가 되자 아버지 세대들로부터 항상 지적질을 당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후대가 너무 어려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면 이제는 “고통 받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고 당연시한다. 교묘한 말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사회 규범을 잣대로 젊은층을 옭죄면서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그렇게 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젊을 때 무엇이든 해 봐야 한다”고 도전의식을 갖지 못하는 젊은층을 야단치며 정작 도전 자체를 못하게 막는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자신들이 누리고 누려온 기득권이 젊은층의 도전을 받게 되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쓴맛’을 보게 하는 작태들은 지금껏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해 온 방식이다.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예전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쥐려고 하는 행위는 자신을 그리고 주위를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후대를 걱정한다는 것은 욕망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에겐 노래의 한 구절을 읊어주고 싶다. “살다보면 알게 돼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그리고 ‘상놈은 나이가 양반’이라는 사실을.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르마를 타 줄 ‘어르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어르신이란 때 묻지 않고 살아온,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을만한 분만을 의미한다. 그는 타인의 삶에 무례하게 관여하지 않는다. 나이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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