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무리다. 마침 4.15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각계의 분석에 따르면 진보 성향이 전체 국회의원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해 개헌을 제외하고는 하고 싶은 어떤 일도 가능하게 됐다.
보수가 폭삭 망했고, 그 결과 앞으로 진보가 정책의 전반을 주도하는 모양으로 흐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분석을 보면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오피니언 리더층의 관념이 아직도 20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도대체 진보와 보수는 어떻게 나뉘어질까? 프랑스 대혁명 시절 왼쪽엔 프랑스를 변화시키고 싶어했던 공화파가,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싶었던 왕당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것이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개념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진보·보수가 뭔 의미


당시에 입장에서 보면 신분과 그에 따른 빈부의 격차를 혁파하자는 의미에서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진보가 좋은 것으로 여겨졌겠지만, 이같은 사고방식은 230여년이 흐르면서 꾸준히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자리 잡은 진영의 논리는 바뀌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폭망’했다는 미래통합당이 보수를 대변하는 당이고, ‘득세’했다는 더불어민주당이 정말 진보를 대변하는 당일까?
한 쪽에서는 80살의 구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을 삼고초려하며 당을 이끌어달라고 애걸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상 최악 20대 식물국회의 모든 책임이 상대당의 발목잡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한다. 참으로 자기 편의적 사고방식이다. 
국민들이 표를 몰아준 것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으니 아무 소리 말고 국가가 제자리에 설 수 있게 싸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달라"는 절박함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끝나고도 잡음이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족속들이다. 
최근 시중에는 트롯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음악 사상 전 연령층이 이토록 열렬하게 트롯에 몰입한 적이 없다. 그동안 트롯이란 장르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나 좋아하는, 가사도 유치하고 곡도 단조롭고 하찮은 것으로 폄훼됐다. 
그런 트롯에 대중들이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원인은 단 하나다. 21세기의 사고방식이 ‘고리타분’이라는 편견을 완전히 박살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의 창의성은 기존의 트롯 레전드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조차 예상치 못한 일들이었다. 
가장 단적인 예가 미스트롯에서 팀 행사미션이었던 군부대 행사 때였다. 춤은 물론 행사 한 번 해보지 못한 팀이 ‘가창력’으로 승부하겠다고 했을 때, 멘토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듯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비아냥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날 공연했던 팀들 중 유일하게 ‘앵콜’요청과 열화와 같은 호응으로 팀 미션 1위를 차지했다. 이 이변은 그동안 군부대 행사에서 군인들이 야한 춤으로 흔드는 쇼에 열광했던 모습만 기억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이어진 미스터트롯은 종편 사상, 아니 경합 예능 사상 초유의 35%대를 넘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 프로가 그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트롯이라는 장르가 아니라 참가자들의 절박함이라는 사연과 창의성이 맞물린 결과다. 

 

고통의 대가 얻어야


이전의 트롯 가수들이 공연해왔던 방식을 따랐다면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뮤지컬이 가미되고, 태권도가 접목되고, 성악이, 그리고 그동안 타 장르에서 갈고 닦았던 실력이 트롯과 접목되면서, 심금을 울리는 어린 감성이, 대중에게 웃음과 눈물과 벅찬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그동안 트롯에 대한 모든 편견을 한 번에 깨버렸던 것이다. 
“내가 불렀던 노래가 맞느냐”부터 “너무 감사하다”는 평까지 이전의 트롯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참가자들의 행위는, 보는 이들이 퍼포먼스에 환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사에까지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한 이유가 대중들이 유치하게만 들렸던 가사를 보다 의미 있게 느끼게 되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트롯에 대한 재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사고방식의 결과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다. 
나이 80살이 넘어서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그 때문에 온갖 추악하고 추접스러움을 보이는 구태야말로 수치심을 모르는 행위다. 그들은 항상 ‘후대를 위해서’라고 이유를 대지만 그것은 후대를 죽이는 일이고,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하는 변명일 뿐이다. 
그들은 경륜을 이야기하지만 후대가 들어야 할 경륜도 별로 없다. 후대에게 그들의 장단점은 이미 듣고 보고 느껴서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거기에는 소위 ‘86세대’도 포함되어 있다. 
학창시절 내내 군부 독재와 싸운 민주화 세력이지만 이젠 참신함과 투명함으로 포장된 또 다른 기득권층일 뿐이다. 21세기는 21세기에 맞는 이들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자신들을 뛰어넘을 대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맞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다른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가 기꺼이 고통받아온 대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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