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삶은 계란(?)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살아 갈수 없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벨트를 차고, 신발을 신고 하루를 만들어 간다. 농부의 수고에 의하여 우리는 밥을 먹고, 빵을 먹고 반찬을 먹고 과일과 음료를 먹으며 하루를 소비한다. 누군가의 나눔(베풂)을 토대로 풍요하게 아니면 소박하게 자기방식에 따라 하루를 또는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가난한자의 벗이며 소외된 사람들의 성녀로 추앙받는 인도의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1910~1997) 수녀는 “나눔은 우리를 진정한 부자로 만들며, 나눔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또한 인생은 사랑(나눔)이라고 정의하고 사랑을 많이 실천하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 주라고 무한사랑을 외쳤다.
우리는 흔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말할 때 금전적으로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돈이 많으면 부자, 돈이 없으면 가난한 것으로 쉽게 얘기한다.
부자들만이 나눔을 실천하고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 나눔을 실천하지 못한 것으로 예단한다. 하지만 부자라고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눔을 실천한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다. 나눔은 마음가짐이지 결코 돈이 있고 없음에 의해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David Thoreau:1817~1862)는 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의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사람이 부자냐 아니냐는 그의 소유물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지내도 되는 물건이 많으냐 적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끝없이 바라고 탐욕 하는 자는 오히려 가난한자의 맑은 마음에 필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피폐하여 재물에 갇혀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백년을 물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하루아침의 티끌에 불과하고 삼일을 닦는 마음은 천년의 보배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일전에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1100만 원 상당의 구운 계란 나눔 행사를 군부대에서 가진 일이 있다. 군 관계자는 군에서도 예전같이 그냥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반 가공(날것 보다는 요리 하기 쉽고 편리한) 형태를 좋아한다고 말해서 나눔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수요자의 요구가 당당하여(?) 마냥 나눔이 좋은 것이 아니구나 하는 조금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눔은 원래 소외계층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 그들이 자신감 있게 사회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본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요자의 입장이 당당한 것을 보면 나눔은 어디까지 해야 옳을까. 끝없이 나눔을 실천해야 옳은가.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소비되는 달걀은 약 4000 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에 비해 생산량은 4500만 개로 과잉되어 산란계 농가들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을 낳는 닭은 48개월이 지나면 산란율이 현저하게 떨어져 그 소임을 다한다고 볼 수 있다. 닭은 연간 약 200개 정도의 알을 낳는데 한 마리가 1000개 정도를 사람들에게 공급(나눔)해주고 나눔(소임)을 마친다. 계란의 자급률은 99%, 1인당 연간 소비량은 274개(16.7㎏), 연간 계란 생산액은 1조4214억 원으로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 특히 다이어트에 탁월하고, 치매예방과 기억력증강, 그리고 노화와 당뇨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많은 나눔을 다하고 가는 닭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인생이 뭔지 고민을 했다. 정답은 인생=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삶은 무엇일까. 또 답을 찾았다. 삶=계란, 삶=돼지고기. 영양가 많은 삶은 계란과 삶은 돼지고기(수육)로 건강을 챙기고 지인들과 안주삼아 한 잔은 어떨까.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