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악성 전염병은 이제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지역성이 아니라 범 세계적인 문제임을 확인시켜줬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모든 국가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히 알게 됐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 수준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지금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이 크게 잘못 되어 있는지도 확연히 드러나 있는 상태다. 이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사회를 고민하는 흐름도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재난의 순기능’이기도 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방역은 전쟁과 닮았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 국가가 펜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 중이다. 공중 폭격과 총알이 빗발치는 눈에 보이는 전장만 없을 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곳곳에서 살벌하고도 치열한 싸움이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영국은 지연 전략을 택함으로써 사실상 통제를 포기했다. 국민들이 알아서 각자 살아남아야 할 판이다. 미국은 마치 바이러스 폭격을 받은 모양새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전략 미스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도 빈부의 격차에 따른 재난의 온도차도 크게 다르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있는 자들은 호화스런 자택에서 자가 격리하며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약간의 불편함만 느끼면 ‘이 또한 지나가리’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겐 사재기할 돈도 없고, 물가는 오르고 살 물건도 없다. 실직이 일상화되어 벌이가 없어 오늘의 삶이 위태롭고 내일의 보장이 없는 불안감의 증폭이다.
정부의 ‘재난기본소득’ 책정을 고민하자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표심을 염두에 두고 무엇이 유리한지 머리를 굴리느라 난리다. 적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군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시급한 때 당쟁을 일삼는 저 정치인들은 도대체 ‘외계인’인가?
삼류도 저런 삼류가 없는 ‘쓰레기(?)’ 집단을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하다. 자신들끼리 서로가 쓰레기라고 욕하고 있는 꼴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의 중간에 낀 ‘총선’은 불행 중 다행이다. 왜냐 우리에게 미래를 선택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니까 말이다.
어찌할 수 없는 범세계적 재난을 겪으면 온갖 부정과 부조리가 속속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지금 코로나 사태는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끝나면 어쩔 수 없이 사회는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밖에 없다.     
‘앙시앵 레짐’은 처음엔 프랑스 이전 근세 프랑스 정치와 사회를 일컬었다. 계몽사상가나 혁명가가 비난조로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알렉시 드 토크빌이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쓴 이후, 타도되어야 할 구 체제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했다.
구 체제란 뭔가? 정치적 불평등과 심화된 빈부의 양극화, 신분사회다. 전체 인구의 2%인 왕족‧종교지도자인 성직자 그리고 귀족이, 98%의 평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가혹한 특권을 행사한 체제다.

 

변화의 문앞에 서서


토크빌은 가난한 평민들의 부역 동원, 각종 명목의 세금 부과, 만연된 불평등에 참을 수 없었던 평민들의 항거가 프랑스 대혁명의 촉발 원인이었다고 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어찌 작금의 현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지 오히려 의아스럽다. 대혁명은 경제 파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풍요로워짐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면서 촉발된 것이다. 
당시 경제상황을 연구한 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구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고 경제 규모가 확대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따라 전체 사회가 영위하는 부의 총량 역시 증가하게 됐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이 누리는 삶의 질이 향상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2%의 특권층의 자산이 배로 늘어나는 동안 빈곤층의 수는 확산일로였다. 일반적인 농민이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던 땅은 단 한 평도 없었다. 소유권이 있다고 해도 지대를 귀족에게 납부해야 하는 전통적인 봉건적 관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농산물 가격은 상승했지만 농민들은 지주가 이를 빌미로 지대를 더 올려 농민들은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늘어난 사회적 부의 분배에서 철저하게 농민과 평민들이 배제됐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앙시앵 레짐, 즉 이러한 모든 구 체제를 완전히 뒤엎었다. 한 번 앞으로 전진된 역사는 결코 뒤로 뒷걸음치는 법이 없다. 아무리 기득권 세력이 강렬하게 저항한다고 해서 완전히 번복되는 경우는 없다.
불행 중 다행히 우리는 바로 낼 모레 총선을 앞두고 있다. 20세기 마인드로 똘똘 뭉쳐 있는 노인을 ‘경륜’으로 포장해 다시 불러내고, 빈부 격차를 더 심화시킨 ‘86’세대들의 반성 없는 오만함이 지금 우리 삼류정치의 본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문 앞에 서 있다. 단지 ‘어떤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만을 선택하면 된다. 코로나가 지금 우리에게 준 귀중한 선택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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