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 사람의 본래 성격이 나온다. 평소에는 점잖던 사람도 험하게 변하기도 하고, 느긋했던 사람도 어쩔 줄 몰라 허둥대기도 한다. 반대로 매사 허둥대던 사람이 의외로 침착성을 보인다. 극한 상황은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감싸던 외피를 벗어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정도 그렇다. 무슨 일이든 잘되는 가정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가정은 항상 걱정과 갈등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잘되서 웃음꽃이 피는 것인지, 일이 잘 안 풀려서 갈등 속에 있는 것인지 ‘원인’을 알려면 극한 상황에 처해보면 안다.
웃음이 만발한 가족은 가정이 존립 위기에 처하면 구성원끼리 약간의 갈등이 불거져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뭉친다. 반대의 가정은 무슨 일만 생기면 ‘네 탓’이다. 그러니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지금 우리가 어느 가정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불행할까?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그나마 소득이 있다면 우리들은 그러한 현상을 낱낱이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포 마케팅 하지만


일부 언론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인들은 이 와중에도 정쟁의 수단으로 우리들의 불행을 이용한다. 이 모든 것들이 구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작태들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국민들을, 20세기의 마인드로 가르치려 한다.
국민들은 나날이 현명해져 가는데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상황을 호도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언론과 정치의 수준을 똑똑히 보고 있다.
우리는 또 그와는 완전히 다른-하지만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우리들만의 감동에 가슴 벅차하고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고 위안을 받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괜찮다’운동을 전개하며 마스크를 더 어려운 이들에게 양보하고, 감염의 우려를 감수하면서 봉사를 위해 결연히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것이 힘든 우리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으고, 고생하는 이들에게 감사해 하면서 손수 도시락을 만든다. 물론 이 와중에도 확진된 상태에서도 나 몰라라 돌아다니고, 재난을 이용한 홍보와 마케팅을 하지만 우리들은 이제 혹하진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민주시민은 영웅숭배를 하지도 않으며, 강요당하지도 않는다. 영웅이라는 저 다루기 힘든 비정상적인 인간을 우리는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들은 또 다양한 부류의 소시민들과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단지 생활의 다양성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결심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이것에 불만을 느끼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맹목적으로 추종할 영웅을 갈망할 뿐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나면 살아가게 될 새로운 공통된 삶의 패러다임이다. 이 코로나 사태는 재난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재난을 당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계층이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것도 각인시켰다.
보이지 않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평소에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중요성을 이전과 달리 보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지만, 전 세계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내는지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이후에 우리가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자부심 가질 날 올 것


우리는 많은 확진자수로 어리둥절하거나 참담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씩 위안을 갖고 있다. 오히려 우리 질병본부의 능력과 ‘투명성’을 어디에나 자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에이미 에드먼슨 박사가 하버드 의대의 대학병원에 딸린 8개 병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다소 설명할 수 있을 듯싶다.
그는 인력구성, 전문성, 업무량 측면에서 모두 비슷한 이 병동들이 투약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네 가지 유형(피할 수 있는, 피치 못한, 잠재적인, 중간에 바로 잡을 수 있는)을 종속변수로 설정한 뒤 6개월 동안 면밀하게 모니터링했다.
6개월이 지나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결과를 발표했다. 당초 그는 최고의 병동일수록 투약실수가 적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수간호사들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투약 실수가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왤까?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덮지 않고, 상급자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연시 했기 때문이다. 반면 투약 실수가 적은 병동은 실수를 보고하거나 의사의 처방에 반론을 제기하면 상급자로부터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실수를 감추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병동을 선택해야 할까? 지금 우리의 참담함이 정말 중국과 일본과 비교할만한 수준일까? 이 아픔을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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