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맴돌고 있던 그 즈음, 파리의 혁명가 모임이나 문인들이 즐겨 모이는 살롱에 자주 들렀다. 그는 1776년 7월 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서’에 토머스 제퍼슨과 공동으로 서명했다.
독립선언서의 일부는 이렇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창조주는 그들에게 침해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했다.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권리는 살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이다. 이러한 권리들을 확실하게 향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부를 구성했으며, 정부의 권위는 피통치자들의 동의에 의해서 합법적이 된다….
정부가 그 형태를 막론하고 처음의 목적에서 멀어진다면, 피통치자들은 그 정부를 바꾸거나 파기하고 처음의 목적에 기초해, 피통치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형태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한을 가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240여 년 전에 쓰여진 독립선언서는 파격에 가까울 정도로 뚜렷하고 신선하다.

 

‘수치심의 권력’


그런 벤저민 프랭클린이 어느 날 살롱에 들렀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스무 살 약관의 변호사 조르주 당통(후에 프랑스 대혁명 주역 중의 한 명)이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이 세상은 온통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징벌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들이 작성한 선언서에는 그 같은 선언이 제대로 지켜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법적, 군사체계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적혀 있질 않군요.”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선언서 뒤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the of shame’입니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과 프랑스 솔로본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 그리고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장을 역임한 장 지글러(Jean Ziegler) 박사는, 세계의 빈곤 문제를 다룬 <탐욕의 시대>에서 수치심의 권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전적 의미의 수치심이란, 창피스럽게 만드는 불명예, 상대방에 비추어 자신이 열등하다거나 무능하다고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 혹은 남 앞에서 자신이 창피하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하등하게 본다고 느끼는 감정, 자신의 의식의 소심함에 비롯되는 거북한 감정을 말한다.
수치심의 권력이란 국민 대부분이 높은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고자 하는 힘을 말한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020년 미국은 어떨까? 인종차별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약소국 또는 협력국을 힘으로 윽박질러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적, 국가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

 

동양인 차별로 확산


유럽을 비롯 전 세계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핀 건국의 이념과 가치가 완전히 변질됐다.
그럼 우리는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걸까? 다시 이 시간 현재 혼란이 진정되지 않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돌아가 보자.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교수는 “‘재난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그 과정이 국가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라고 말한다.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매뉴얼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발생에서 철저한 원인규명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갖가지 혼란을 정리해서 두 번, 세 번 겪지 않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위험한 부류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다. 이들에 대한 보호책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되어 있느냐가 관건이고, 이 성공여부는 사회적 공감대의 형성이 가장 우선이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형국이다. 감염될 것이 두려워 약자를 차별하고, 무시하고, 배척한다.
자신이 속한 내집단 즉 ‘우리’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외집단 ‘그들’로 나누어 죽기 살기로 서로를 비난하고 싸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서로의 처지를 살필 겨를도 없다. 과거에 자신의 처지가 어땠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일라치면 죽으라고 집중공략이다.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보이고 있는 우리의 잔혹한 자화상이다.
우리는 ‘차이나포비아(중국인 공포)’로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지만, 지금 유럽을 포함한 아시아 밖에서는 ‘제노포비아(동양인에 대한 공포)’가 중국인을 넘어 아시아인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중국인과 다르게 볼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우리만의 착각이다.
도대체 우리에겐 어떤 가치가 공유되고 있는 걸까? 수치심을 갖는, 수치심이 뭔지를 아는 최소한의 윤리적 사고는 가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관심’이라도 갖고 있는 걸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ASF 피해농가들의 고통은 비중의 차이에서 아예 묻혀버렸다. 한돈산업 전체를 위해 반강제적인 예방적 살처분에 동의했지만 이후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피해농가들이 통일동산에서 청와대까지 차량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왜 이토록 잔혹하고 잔인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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