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대하는 대한민국의 사회를 지켜보면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는지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국회와 일부 언론은 국민들의 혐오감을 부추기고, 국가 간의 협력을 무력화시키고, 심지어 동족 간의 갈등까지 조장하고, 그에 따른 민심도 흉흉하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의 우한에서 발생했지만, 마치 정부가 이를 조장하고 확산시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정부의 모든 것이 잘못됐으니 이참에 바꿔야 한다는 정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선조 앞에서 전쟁의 위기감을 보고하는 상대방의 의견과 정반대의 의견을 냈느냐는 질문에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으니까”라는 허무맹랑함까지 느낀다.

 

삶의 가치 잃는 중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 정당이 그렇게 하니 반대한다는 ‘무조건적 반대’의 피해자는 물론 백성이다. 현대의 국민이다. 저들에게 국민은 보이지 않는 실체다. 그리고 그들의 정략에 놀아나는 사람도 그렇지 않는 사람도 모두 피해자다.
자고로 대한민국은 예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불렸다.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예의 밝은 민족의 나라라고 평했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해 뜨는 동방의 예의지국 또는 군자국(君子國)으로 일컬어 왔다.
중국의 공자도 자신의 평생 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우리의 민족성을 가리켜 “어진 사람”(仁人)이니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한다”(好讓不爭) 혹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잠그는 법이 없으며, 여자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두터우며 음란하지 않다”고 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도대체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쓰레기’ 사고를 가치로 여기게 됐을까. 우한의 공황 상태에 놓인 동족을 국내로 탈출시키겠다는 데 반대 여론몰이를 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병원균 취급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반인륜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조건 반대의 논리


이웃이 땅을 사면 배 아파했을지언정, 이웃이 아프면 함께 아파해주던 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지켜온 풍습이었다. 비록 중국이 역사를 왜곡해왔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지각했다고 해도 재앙 수준의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거 잘됐다”고 고소해 하는 것은 정말 할 짓이 아니다.
특히 ‘중국인 입국 금지’를 전격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정부를 비난하며 ‘중국 눈치 보기’라고 프레임을 씌우고 ‘중국인 혐오’를 확산시키는 일부 정당과 언론은 재난을 정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려는 것 외에는 대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지난 4일 16번째 확진자의 경우, 중국을 다녀온 것과는 전혀 별개의 확진자다. 태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던 사람으로 제주항공으로 입국했다. 중국인들의 전면 입국 금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막는 최선의 방법도 아님을 보여준다.
지금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이같은 주장은, 진정 국민의 안전보다는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 설정을 하고자 하는 정부 방침을 폄훼함으로써 현 정권을 흔들고자 하는 프레임 걸기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하나의 덩어리로 엮어지면서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위험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은 가장 흔한 형태다. 그만큼 불안과 위기감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WHO가 신종 전염병 등에 지역을 표기하지 말라고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 등에서 아직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우한 폐렴’으로 표기하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도 혐오 조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Helene Joffe의 <위협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항상 ‘타자’와 연관되어 왔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사스나 메르스보다 훨씬 약하다고 해서, 현재 확산되고 있는 위험성이 큰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왠 호들갑이냐”는 불감증에서도 아니다.
위험 앞에서 그 위험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하느냐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나만의 이익을 위한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 또 그대로 되지도 않는다.
당장의 이익이 달콤하겠지만 그 달콤함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당장의 손실이 크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최근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도 그 중 하나다. 이러한 변화와 어려움을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설정하느냐에 대한 좋은 계기로 삼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힘만 낭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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