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끝자락에서 또 한 해를 돌아본다. 살아가야할 미래의 날들이야 희망을 가져봄직 하지만, 겪어온 시간이 의미를 갖지 않고선 앞의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랑에 대한 감정과 평등에 대한 깊은 고뇌 없이 아무리 부유하다 한들 또 무슨 가치가 있으랴. 이러한 감정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중요하지만 정작 결정을 하는 순간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1912년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등 항해사 찰스 래히틀러는 당시의 상황을 17쪽 분량으로 정리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적었다.
그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다. 물론 그는 남은 여생을 홀로 살았다는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날의 상황을 정리해 본다.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다.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다. 선장은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많은 여성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구명보트에 오르라는 남편의 권유에 그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차분한 어조로 “당신과 함께 남겠어요”라고 했다. 그것이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선택


당시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이었던 애스터 4세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보내며 갑판 위에서 한 손엔 애완견을, 한 손은 아내를 향해 “사랑한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한 선원이 보트에 타라고 하자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그는 타이타닉 호를 10대나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 수 있는 기회를 양보했다.
성공한 은행가 구겐하임은 화려한 이브닝 복장으로 갈아입고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다”고 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라고.
미국 메이시 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는 세계 2번째 부자였다. 그는 아내 로잘리를 설득했지만 그녀는 “세상 어디든 함께 하겠다”고 끝내 거절했다. 당시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의 그에게 “그 어느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탑승을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그 부부는 갑판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바닷물로 침몰 시킬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남편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리더파스는 남편을 꼭 껴안고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했다. 남편은 주먹으로 그녀를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구명보트 안이었다. 그녀는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홀로 살았다.
생존자 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한 여성을 회고했다.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 돼서 제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때 한 여성이 일어나서 저를 구명보트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아이들은 어머니가 필요합니다’며 자리를 기꺼이 양보했습니다.” 그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 없는 어머니’기념비를 세웠다. 

 

책임감이란 이런 것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햄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저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타이타닉 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이등 항해사 래히틀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새벽 2시 각자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번 연산사 존 필립스는 끝까지 전산실에서 ‘SOS’를 입력하며 자리를 지켰다.
선미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은 서로에게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그날 그 현장은 위대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 노텍스트는 여장을 한 채 구명보트에 올랐다. 귀국 후 바로 퇴직 당했다.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10여년 후 후회와 수치로 가득찬 삶을 마감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책임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평가받아온 품성은 어쩌면 가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위급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다 경건한 자세로 한 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맞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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