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실패를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게 되어 있다. 피 튀기는 경쟁이 이뤄지는 세계의 무한 경쟁시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뒤처지는 일이다.
그리고 한 번 뒤처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럴수록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다. 「사자도 굶어 죽는다」의 저자인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서광원 기자는 초원의 제왕인 사자도 사냥 성공률이 10번 쫓으면 3번 정도만 성공한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쫓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자가 사냥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누우나 얼룩말에게 접근하는 모습이 그렇고, 사냥에 실패해 멋쩍게 돌아오는 모습도 그렇다. 하지만 사자는 실패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실패는 재앙과 같아


그러나 한국의 상황에서 실패란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재앙이다. 사회적 안전장치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보장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그렇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자영업자로 사는 것은 항상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천민으로 사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인재든 천재지변이든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수시로 겪게 되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 책상머리 정책 등등 거기에서 비롯되는 재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재난을 대처하는 자세를 보면 그 나라가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후진적임에 틀림이 없다.
농업 강국과의 잇따른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WTO 개도국 지위 포기 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국가관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농민의 고통은 가히 재난 수준이다.
국가가 쉽게 비교우위 경제를 내세우면서 농업을 홀대하거나 차별하고, 대충 얼마간의 경제적 보상책을 내세우지만 정작 당사자인 농민의 심리적‧의학적 상황에 대해서는 별무관심이다. 그러니 ASF 예방적 살처분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농민의 고통은 재난


고려대학교 대학원 보건학과 교수로서 사회역학을 전공한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차별이 사람의 몸에 어떤 상채기를 남기는 지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폭력이라는 차별을 겪게 되면 우울증‧조현증‧자살 충동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고 밝혔다.
게다가 공동체가 와해되면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에 상상 외의 피해를 입게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재난의 피해자는 대부분 노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며 이를 ‘불평등의 비극’이라고도 했다.
지금 농민들이 입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쉽게 지난 1995년 485만명에서 2018년 231만명으로 감소했다고 말하지만 그 사라진 200여만 명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러니 ASF 예방적 살처분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농가에 대해서도 깊은 배려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가 처음 단지 사육하던 돼지에 대한 보상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현장에 대한 몰이해의 증거다.
김승섭 교수가 쌍용자동차 노동자 20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통해 갑작스러운 실업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한 번 보자. 설문 대상자 중 105명(50.5%)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 수치는 같은 측정도구를 이용한 미국의 한 연구에서 1990년 1차 걸프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 중 22%가, 이라크군에게 포로로 잡힌 군인들의 4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그 잔인한 숫자가 오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쌍용자동차에서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29명이 뇌출혈로, 심장마비로, 당뇨 합병증으로 죽어갔다.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보험을 그리고 적금을 해지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사적 안전망’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희생을 강요당하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 농민 삶의 피폐함이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무엇이 다른가?
억울함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상처는 고스란히 몸이 기억한다.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할 때, 또는 아무리 아프다고 말해도 그것을 ‘엄살’로 얼버무리는 사회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모진 삶이다.
실패가 두려워 나아가지 못하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교묘히 포장하는 공무원이나, 농업을 차별하고 아무런 사전대책 없이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국가 경제의 방향이라고 설득하려는 국가는 올바른 국가가 아니다.
‘선대책’이란 함께 어울러 사는 사회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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