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을 제외한 주변 시각
‘동물 살해기아 촉발’ 왜곡
시위와 반발로 대응해본들
예전처럼 편들지도 않아

‘우리만의 리그’서 벗어나
경종 농가주민들과 상생
축산 환경개선 자정 노력
국민에게 감동 심워줘야

 

동물보호단체들이 “여러분이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동물이며, 그런 동물을 살해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단 비건이나 채식주의자들만의 한정된 구호일까?
극성스러운 동물보호단체는 축사로부터 가축을 탈취하기도 해 축산농가와 마찰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 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행위는 비일비재하다. 축산농가를 마치 연쇄살인범 취급하는 이들의 행위가 한정된 것일까?
축산농가의 입장에서 보면 삶 자체를 위협하는 행위들이지만, 동물옹호단체들 또는 동물권리와 윤리를 주장하는 서적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상황은, 축산농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행위들과 앞으로 더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최근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제작했던 영화감독 황윤 씨가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지난 3월 14일 개최한 제1회 농촌현장 창업보육 집담회에 초청돼 “육류 생산에 문제가 많다”며 “축산업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라고 했다고 해서 축산업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축산업이 ‘있어서는 안될’ 산업이라거나 축산업은 ‘동물을 살해하는’ 또는 ‘기아를 촉발시키는’ 산업이라는 단정적 사고는, 축산인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뿐이 아니다.
또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저명한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그 파괴력도 상상 이상이다.  ‘죽음의 밥상’이라거나 ‘육식의 종말’이라거나 ‘비만의 제국’이라거나 ‘동물 홀로코스트’라거나 제목만 봐도 무시무시하다.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도 이전에 영화 ‘옥자’로, 축산업자들을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그렸다. 마지막 장면은 홀로코스트의 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축산농가를 대변하는 축산단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축산에 대한 폄훼 행위가 발생해도 잘 모른다. 모니터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기에 그렇다. 또 발생하더라도 단체 행동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 뿐이다.
이런 대응이 얼마나 갈까? 당장의 효과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왜 철회하라고 하는지, 왜 잘못을 인정하라고 하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다.
국내 1인당 육류소비량은 70년대에 8kg 안팎에 불과하던 것이 2018년 기준 53.9kg으로 약 7배가량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만큼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젠 고기를 먹지 않고는 생활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 맞다.
그러니 축산농가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고기를 즐기면서 그 고기를 생산하는 축산농가를 ‘살육자’로 표현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좋지만 고기가 생산되는 과정은 되도록 보지 않았으면 한다.
육류자급률이 해마다 하락하는 것은 이런 것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소고기는 40%선, 돼지고기는 70%선이 붕괴되었다. 이처럼 축산업을 영위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육류소비의 대부분을 외국산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농업 인구의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다. 7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은 농업이 산업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도시민이거나 직장인이거나 심지어 공무원 태반이 농민의 자식이었다.
시골에서 나는 냄새는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농촌을 연상하면 힘겹게 자식을 키우던 부모의 애틋함을 의미했다. 농촌과 도시의 연결이 더 자연스러웠다. 농산물이 과잉돼 가격이 폭락하면 ‘팔아주기’가 성행했다.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 농촌의 어려움을 대변했다. 매년 예산을 책정하는 데에도 농촌에 대한 많은 이해가 있었다. 소비자들도 지금처럼 ‘이기적’이지 않았다. 고향의 부모를 생각해 비싼 가격에도 대체로 순응했다.
하지만 2019년의 오늘은 결코 그렇지 않다. 도시민들 태반이 농촌과 관계없다. 한때 독일   에서 유행했던 ‘아스팔트 킨트’, 즉 농촌을 모르고 도시에서만 살아온 아이들을 뜻하는 이 단어가 현재를 대변한다.
이들에게 농촌은 단지 ‘목가적’일 뿐이지,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1차적이지 않다. 이것이 현재 축산업이 처한 현실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눔’이 중요한 이유다. 나눔은 사랑의 기술과 같다. 저쪽에서 가까이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다가가야 이해라는 공통점이 생긴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라”고.
“왜 축산업의 가치만큼의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고 따져보고, 반발해 보고, 집회를 열어봐도 마음을 닫고 축산업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돌아오는 것은 냉대뿐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동안 소비자들이 일부 몰지각한 축산농가 또는 둔갑과 부정 유통을 일삼던 일부 축산물 유통업자 등에게 당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분위기를 대하는 생산자단체나 농가들의 안일함을 보면 한숨이 먼저다.
축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축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 전파로 긍정적으로 전환시키고자 손잡았던 축종별 자조금연합회는 해산됐다. 규모에 따라 배정된 예산에 대해, 또는 배정한 예산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가 주요 원인이다.
나눔축산운동본부가 홀로 남아 온전히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작금의 축산업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소비자단체를 대표한 나눔축산운동본부의 이사나, 학계를 대표한 교수도 수시로 나눔축산운동의 확산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한다.
하지만 같은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생산자단체의 경우, 나눔의 수혜자인 축산농가를 대표하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 사업과 전혀 관계없는 토론회는 물론 행사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행태다.
축산업의 부정적 인식을 바로 잡자고 어렵사리 손잡고 결성했던 축산 자조금연합회를 ‘효과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 때문에 ‘아깝다’는 이유로 스스로 해체하고 나눔에 강제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나눔이 축산농가의 자정노력을 독려하고, 축산 환경을 개선하고, 사회 공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축산업의 지속 가능을 위해서다. 하지만 농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물론이고 생산자단체들의 이해도는 낮아도 너무 낮다.
그것은 나눔축산운동에 후원하는 단체와 개인의 구성만 놓고 보면 더 확연하다. 협동조합이 90%를 넘고, 축산관련단체는 0.8%로, 축산관련 영리법인의 8.2%에도 훨씬 못 미친다. 아직도 축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여파가 어떠한 지를 절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축산과 관련된 모든 규제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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