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캐머스 데이비스의 「칼을 든 여자」를 읽게 된 계기는, 작가인 캐머스가 잡지사에서 라이프스타일 지면을 담당하면서 행복한 삶을 조언하는 10년의 기자 생활을 하다 해고당한 후 프랑스 가스코뉴에서 도축을 배워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포틀랜드고기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귀 ‘고기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사이’ 그 중간지대를 찾아 나선 어느 여성 도축사 이야기에 혹해서였다.
축산업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부정적 시각에 딱히 축산업을 변호할 논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홍보 글귀처럼 뭔가의 논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5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과도 같은 그녀의 일기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기대감은 ‘역시나’로, 나름의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육류 유통 잘못 지적


‘동물이 접시 위에서 생을 다할 때까지 거치는 모든 과정을 되도록 가까이에서 지켜보려는 어느 도축사의 집념 어린 다큐멘터리’라는 홍보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보기에는 좀 과장스러웠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시각으로서도 내가 가축이 먹을 곡물을 직접 재배하고, 그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고, 내 손으로 직접 그 가축을 도살하고,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모든 것을 음식화 하는 과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는 너무 흔해(?) 아무 생각 없이 섭취했던 육류가, 그곳 프랑스의 가스코뉴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 즉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기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좋은 삶을 살았고, 좋은 죽음을 맞았다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성찰이다.
그렇게 가족이 운영하는 작업장에서 도축‧가공 처리된 축산물은 시골장 한 코너의 명물로 유럽인들의 옛 향수를 자극하는 식재료로 팔린다. 미국의 소비자들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부위까지 그곳에서는 거부 반응 없이 옛날 즐겨먹던 그대로의 식품이다.
고기를 사러온 고객이 “이것이 어떤 부위인가?” 또는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가스코뉴에서의 일화를 통해, 캐머스는 그런 과정에서 미국의 육류 유통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따진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축산물 유통에 대한 안전과 위생을 강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자신이 파는 고기에 대한 무지함을 함께 지적하는 것과 같다. 소규모 축산농가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직거래 장터’에서 찾고 있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녀는 가스코뉴에서 가축의 도축 방법을 배워, 미국으로 돌아와 그곳의 방식으로 가축을 키우는 축산농가와, 가축과 교감하면서 도살하는 도축사들을 연계해 포틀랜드고기공동체를 운영한다.
희망하는 귀농인, 학생, 정육점주 등에게 도축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입에 넣는 고기가 어디서 어떻게 키워지고, 어떤 부위인지 각인시킨다. 캐머스의 방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리빙 잡지 ‘마샤 스튜어트 매거진’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도축방식을 배우러오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참고로 마샤 스튜어트는 살림이라는 주부들의 일상을 비즈니스로 끌어올린 입지전적 인물로 전 세계 주부들의 살림 롤 모델로 통하며, 국내에서도 '살림의 여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동물의 사체를 눈앞에 두고 죽음과 음식의 교환이 일어나는 어느 한순간도 외면하지 않으며 우리 대부분이 외면해온 육식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한다”고 자신의 작업에 의미를 두지만, 그녀도 동물애호가들과의 마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반전시키기 어려워


‘기르고, 죽이고, 먹는’ 모든 행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 행위들이 비록 올바른 육류 유통과 섭취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물애호가에게는 일반 유통보다 훨씬 ‘끔찍한’ 방법이기에 그렇다.
캐머스도 자신은 동물보호자라고 믿는다. 공장식 축사에서 공급받지 않고, 소비자들이 어느 가축의 어느 부위인지도 모른 채 섭취하는 방식은 잘못된 방식이라고 줄곧 지적한다.
하지만 동물애호가들의 반발에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도축 수업에 참여한 한 학생의 말을 빌어 대답할 뿐이다.
“저는 학생입니다. 도축 수업에 처음 참여해 직접 살아있는 가축을 죽이고 지방과 살을 발라내면서 많이 불편하긴 했지만, 이러한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제는 고기를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0쪽에 가까운 책을 읽으면서 축산업의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 찾기는 실패했다.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이 불편함을 지나쳐 ‘혐오’로 가는 상황을 반전시키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일까?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과연 축산농가를 비롯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협동조합이나 생산자 단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누가 혐오발언을 했다고 왜 해당 산업을 폄훼하느냐 따질 뿐이다.
왜 정부가 나서지 않느냐 거나 왜 이런 문제들을 언론에서 다루질 않느냐며 불구경이다. 자조금도 있다. 문제는 적극성도 계획성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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