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흔히 제4부(第4府)라고 불린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그 다음의 부서다. 국민을 대신해서 이들 3부를 감시하는 부서라는 뜻이다. 
기업이나 이익집단들의 막강한 로비에 휩쓸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소수 또는 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을 만들고, 중소기업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는 규제를 정해 자유로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것이 임무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자유롭게 어떤 정부 부서건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언론은 많은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제 역할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며 그 꿀맛에 흠뻑 취해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의 나팔수 역할에 만족한다.
여론을 주도하거나 진실 여부를 가려내 ‘가짜 뉴스’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제 입맛대로 뉴스를 요리하는 ‘사이비’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진실을 찾는 노력보다는 기업이나 단체 등에서 전하는 보도 자료를 마치 진실인 양 그대로 전하는 게으름은 둘 째 치고,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언론사의 후광을 등에 업고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막말로 ‘떼’를 쓰면서 그것이 마치 기자의 특권인 양 호기를 부린다.
그들의 한자 한자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알기에 쓰면 ‘골치 아픈’ 것에는 되도록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애정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다.
말로는 사회의 정의를 외치면서 글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까? 대변지 또는 홍보지라고 해야 할까?
주류 언론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연연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국민이나 정부를 가르치려 들기도 한다.
그 거만함에는 언론이라는 특수한 역할에 대한 성찰이 없다. 권력과 금력과 유착하면서 사회 상층부에 올라가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
정치권의 유력한 정치인과 사귀면서 정계로의 진출을 꾀하고 그렇게 정계에 입문하면 비판하던 이와 하등의 차이도 없다. 오히려 언론에서의 인맥으로 그들의 ‘분탕질’은 한 술 더 뜬다.
언론은 항상 진보를 이야기하고, 비뚤어진 사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작 하는 일은 핑계와 구체제의 답습이다.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스포츠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사실을 얼마 전 끝난 ‘FIFA U-20’ 월드컵 축구중계를 보면서 알았다.

 

온갖 미사여구 붙여


축구 꿈돌이에서 2017년 스페인 발렌시아 CF 메스타야 입단해, 그 구단으로부터 ‘보석’ 대접을 받은 이강인의 실력이야 이번 FIFA U-20 월드컵 골든볼로 입증된 바 있지만 그 외의 선수들이 받은 대접은 실력에 비해 평가 절하다.
세네갈과의 8강전이 끝난 후 스포츠 신문을 비롯 주류 종합지까지 앞 다퉈 이강인 띄우기에 나섰다. 그의 킬 패스로부터 골이 연결되긴 했지만 정작 골을 넣은 이지솔은 뒷전이었다. 세네갈의 맹공 속에서 이광연의 슈퍼세이브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에콰도르와의 4강전은 또 어떤가. 마지막 20초를 남기고 골을 막아낸 그의 선방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
이강인의 골든볼 수상은 그의 실력에 비추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선수들에 대한, 특히 수비수들에 대해 언론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한동안 언론들은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에 대해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스포츠계의 성폭력이나, 일부 선수들의 자질 부족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엘리트 스포츠를 주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렇다면 언론들의 이 같은 기사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국민 알권리’를 이용


바로 이와 같은 언론들의 행태가 엘리트 스포츠를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국민들의 높아진 의식 수준은, 이런 행태에 대한 즉각적인 비판을 가함으로써 균형을 잡는다. 아나운서의 과장된 말, 표현은 오히려 불편하다.
한국의 언론들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의식적으로 애국심을 유발하거나 조직의 연대감을 강요하거나,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국민들도 흥분하기를 바란다. 
기득권의 편에 서서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는데 초점을 맞추는 순간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다른 부류에게는 결코 곁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럴 듯하게 가져다 붙인다.
자신들이 지식인이고, 여론을 주도한다는 자만심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입법부나 사법부나 행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국민들이 기댈 곳이라곤 ‘제4부’임에도 그들은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도 ‘국민’을 앞세워 ‘알권리’를 이용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영화 제목이 아니다. 가장 혹독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곳이 바로 언론사다. 성숙한 국민의 수준에 맞는 언론이기를 항상 소망한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