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이 공동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다. 창조주는 그들에게 침해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했다.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권리는 살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이다.’
프랑스대혁명의 태동이 무르익을 즈음 약관 스무 살의 변호사 조르주 당통(혁명을 주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물었다.
“이 세상은 온통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징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당신들이 작성한 선언서에는, 이 같은 선언이 제대로 지켜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법적, 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건 잘못 생각한 겁니다. 우리의 선언서 뒤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입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

 

수치심의 사전적 의미는 창피스럽게 만드는 불명예, 상대방에 비추어 자신이 열등하다거나 무능하다고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 혹은 남 앞에서 자신이 창피하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하등하게 본다고 느끼는 감정, 자신의 의식의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거북한 감정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남아메리카나 대부분의 아프리카나 일부 아시아의 굶주린 도시 빈민들은 수치심이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려면 우선 나 자신으로부터 수치심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한다. 수치심을 떨쳐내지 못한 허기진 빈민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2008년 4월까지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기아의 현장을 기록한 장 지글러(Jean Ziegler)는 저서 ‘탐욕의 시대’에서 “다시 연대만이 희망”이라고 언급한다.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외국 회사들에게 조업권을 팔아넘기면서 어촌들이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측에서 실시하는 농업 정책(농부들과 목축업자들에게 농업 생산과 수출 지원 명목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에 힘입어 농산물 수출업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농업 덤핑을 일삼고 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식량 생산 농업은 체계적으로 초토화됐다.

 

포괄적인 권리 찾기


수많은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작은 어선이나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거친 파도를 건너며 수장되거나, 유럽의 입국 거부로 어딘가로 떠돌다가 사라진다. 이들 모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명을 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들이 계속 그리고 지금도 바다로 뛰어드는 그 이유는 바로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모든 권리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식량 거래를 왜곡하고, 소비자를 속이거나 현혹시키는 거대 다국적 기업들, 농식품 가공업체들의 횡포에서 더 이상 소비자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하에, 소비자 보호정책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태어난 것이 ‘소비자의 권리’다. 
1960년대 미국에서 천명된 ‘소비자의 이익보호에 관한 특별교서’는 1970년대 한국에서도 여성운동과 함께 출현해 여성의 인권 신장까지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시민단체로서 여성들을 규합하고, ‘인권’이라는 공감대로 뭉친 남성들과의 연합으로 시민운동의 큰 축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소비자 권리 확보는 단순히 막연하고 무형의 소비자의 권리를 지칭하지 않는다. 개개의 소비자들을 우롱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의 횡포에 맞서 건전한 경제 질서를 확립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그렇게 삶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말한다.
왜 소비자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장 지글러의 “연대하라”는 호소와 다른 나라의 빈민을 이야기하는가? 그건 그런 포괄적인 권리 찾기가 전제되어야 진정한 소비자 권리를 논할 수 있기에 그렇다.
또 소비자의 알 권리란 상품이나 식품이 어떤 원료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구매자의 입장이라고 해서 멋대로 좋은 물건을 싸게 팔아야 한다고 강요(?)해서도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갑질 중의 갑질이다.
축산업이 1차 산업에서 6차 산업으로 진행되면서 이제 농가는 생산에만 전념할 수가 없게 됐다. 가축을 키워서 고기를 판매하는 것까지, 때문에 소비패턴의 변화까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물복지가 보편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축산 농가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육 방식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축산농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소비자들은 알 권리가 없을까? 
“‘값싸면서도 좋은 것’을 생산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요구는 소비자의 권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도와 실제 대가를 지불하는 용기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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