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어둡고 비관적인 글만 쓰지 말고 좀 밝은 것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 지난해 말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중 지인이 툭 던진 말이다.
“글세, 난 비관적이지 않았는데…비판적이라면 수긍하겠지만…그리고 신문이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하면 그냥 홍보지거나, 광고물이 아닌가?”
지금도 ‘비관’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둡다’고 한다면 그건 소재나 글 쓰는 방식이 문제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을 캐어내 밝음으로 인도한다는 방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살이가 어디가 밝음이고 어디가 어두움인지 모호한 상황이다. 차라리 모두가 인정하는 기준선이라도 정해졌다면 모를까. 배운 대로 흘러가지 않는 참 기이한 상황이다.
지난해 말 경북 영주에서 한우 100여 마리를 사육하는 송무찬 까치농장 대표의 ‘한우 한 마리 나눔기부’가 있었다. 한우농가로서 처음일 뿐만 아니라 나눔축산운동본부에서 생물 한 마리라는 ‘현물 기부’로도 처음이었다.

 

농가에선 처음 기부

 

그는 나눔운동의 취지를 듣고 선 뜻 ‘한 마리 기부’에 응했다. “한우농가로서 가진 돈은 없으니 사육하고 있는 소를 한 마리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를 팔아 수익을 남기는 한우농가로서는 참으로 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의 부인 유영희 씨는 환영하는 모습이었지만 들뜬 기분은 아니었다. 이유는 그녀에겐 ‘통 큰’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주 시로부터 봉사대상을 받은 이미 봉사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기부식 날에도 그녀는 ‘아너 소사이어티(고액 기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송무찬 씨 부부는 소 한 마리 기부가 기점이 돼 ‘릴레이 운동’으로 확산되기를 바랐지만, 아직 후속으로 참가하는 농가의 소식은 없다. 역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아는 모양이다.
오히려 이 기부에 대한 한우업계 일부의 반응이 ‘희한’하다. “나서기 좋아해서” “뭐 이유가 있겠지”라는 둥 ‘~때문에’라는 반응으로 선량한 의도를 폄훼하는 것을 보니 역시 세상은 배운 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서 찾는 빅터 프랭클의 ‘인간의 품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랭클은 빈 의과대학에서 신경정신과 교수로 재직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2년여를 그곳에서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나치대원들의 기분이나 순간적인 선택에 의해 가스실로 끌려가거나 맞아 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는 잠시의 삶을 위해 동료를 배신하는 행위가 비일비재 했던 그곳에서조차 남을 위해 희생하며,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어느 가혹한 순간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동물처럼 물고 뜯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이것은 오직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이었다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정신요법 제3학파로 일컬어지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그 로고테라피가 바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치료법이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80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의 학생들은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프랭클 교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더 잘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유를 모르거나 이유찾기에 실패하면 체념상태가 오고, 48시간 안에 ‘확실히’ 죽었다고 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나눔이나 기부의 의미는 ‘나눠주기’ 혹은 누군가에게 ‘아부하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정’의 노력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부는 사회의 생산적인 발전에 기여하고, 기부된 자원과 혜택을 입은 사람이 다시 생산적 기부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 기부를 생색내기나 그와 유사한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생산자단체들(물론 이들만이 아니고 기업들도 포함된다)이 연말연시만 되면 연탄을 나르고, 급식 봉사를 한다. 이 모두 선의의 아름다운 사회공헌 활동이다. 하지만 단체장(기업 오너)들이 참석하는 행사를 기획하는 직원들은 본래의 뜻보다 그들의 홍보에 초점을 맞춘다.
행사에만 반짝 등장하는 이들에게 국민들이 과연 감흥을 느낄까? 그들은 평소 국민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별로 없다. 게다가 이런 행사에 드는 비용은 개인의 돈이 아니다. 조직의 돈(또는 자조금)을 쓰면서 소위 ‘광’만 내는 이러한 행태는 조직의 돈과 개인의 돈을 구분하지 못하는 ‘배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못하면서 남의 행동을 폄훼하는 일부터 삼가는 것이 맞다. 정말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축산업이 되려면 고객과 국민들과 소통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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