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사랑받는 축산업’은 몇 년 전부터 농림축산식품부와 농협중앙회 그리고 생산자단체들이 지속가능한 축산업을 지향하면서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지금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축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반드시 이뤄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이다.
지자체들 역시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깨끗한 축산농장 지정을 받아 ‘깨끗한 축산농장 조성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농협도 마찬가지다. ‘클린업 축산환경개선운동’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깨끗한 축산농장’이란 가축의 사양관리 즉 사육밀도, 환경오염 방지,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 축사 내·외부를 깨끗하게 관리해 악취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가축분뇨를 신속·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쾌적한 도시·농촌 지역의 환경조성과 지속가능한 축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축산농장을 말한다.

 

̔사랑받기̕ 절박함


‘클린업 축산환경개선운동’은 매월 10일 10시, 농협과 축산농가가 함께 축사주변 나무심기, 벽화그리기, 축사 인근 마을 하천정비, 화단 조성 등을 실시해 축산농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이웃 주민과 경종농업이 다함께 공존하는 축산을 만들어 나가자는 농협 주도의 농가 의식개선 캠페인으로 올해도 전국적으로 약 3만 그루의 나무를 식재할 예정이다.
지금처럼 정부나 협동조합이나 농가들이 적극적으로 환경개선사업에 나서고 있으니 향후 축산업은 국민들로부터 정말 사랑받을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사랑 받아야 한다”는 그 슬로건이 “사랑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비춰지는 것은 왤까?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축산농가들이나 축산관계자들의 의식 속에 국민을 사랑하지 않았거나 아예 국민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든 초점이 “국민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로 쏠리고 있는 것에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사랑부터 하고 나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개인의 경우,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뜻을 헤아리고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매일 마음에 새겨 그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국민이 축산업을 오염산업으로 인식하는 가장 큰 원인이 정말 공장식 밀식사육이고, 거기서 비롯되는 악취와 질병 때문만 일까? 농장을 화려한 나무들과 꽃으로 가리면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사랑으로 바뀔 수 있는 걸까?
축산관련 전문가라는 학자들은 국내 축산업이 ‘냄새나는 산업’으로 매도되고 있다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고 한다. 국민 건강 증진과 경제발전을 넘어 식량안보까지 기특한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란다.
농림업 생산액 중 축산물의 생산액이 전체의 3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축산업을 식량으로 봐야한다고 한다. 가축분뇨 발생량이 2015년 기준으로 6326톤이며 이중 90%는 자원으로 이용되고 있어 과거처럼 허술한 처리는 더 이상 없다고 항변한다.
축산농가의 입장에서는 축산업을 오염산업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시원스러운 답변이다. 맞는 말이다. 하천 오염이나 환경오염의 주범은 가축분뇨보다 생활폐수요, 공장에서 유출되는 환경오폐수다. 
그런데 왜 유독 축산업에만 이중삼중으로 법률적 규제를 가하고 있는가? 왜 축산농가들의 노력을 아예 무시하는가?
구제역 재앙이 전국을 휩쓸었을 때의 일화다. 충남의 A 농가는 2000마리 규모의 돼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때마다 마을 어르신들과 주부 그리고 청년회에 돼지고기를 기부했다. 현재 많은 축산농가들은 경제적으로 지역의 유지로 인정받는다. 때문에 마을의 행사 때마다 뭔가 기부를 요청받지만 그는 특정한 때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 왔다.
마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농장으로 인해 불편한 점이 없는지에 대해 묻곤 했다. 그는 자신이 농장에 있을 때 맡는 냄새가, 주변 사람들이 맡는 냄새와 다르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수시로 주변과 마을 사람들에게 당연한 대가(?)를 지불한다고 생각했다.
구제역 파동으로 그도 농장의 돼지를 모두 땅에 묻었다. 시름에 잠겨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의 슬픔과 함께 해준 사람들이 바로 마을 주민들이었다. 재기할 수 있도록 뒤를 봐준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원하는 것 파악부터


당시 아예 농장을 다시 지을 수 없도록 민원이 빗발치던 상황이었음에도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도 밀식사육을 했다. 그런데 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도와준 것일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마을사람에게 다가갔으며, 자신이 돼지를 사육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에는 마을 주민들이 누려야 할 쾌적한 환경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킨 비용이 들어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 비용이 뭔지 모른다.
많은 축산농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왜 주변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나눠야 하는지 모른다. 스스로 노력의 대가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축산업의 경제적 가치와 규모를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그것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랑을 받으려면 그 대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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