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 메커니즘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지만, 주변 세계가 온통 변하고 있는데,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왜 변하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영국 유권자들은 권력이 유럽연합으로 이동했을 거라 생각하고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미국 유권자들은 ‘기득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고 생각하고 비기득권 후보자들인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다.

 

행정처리조차 사치

 

하지만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해도,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해도 권력이 일반 유권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20세기 방식의 독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기술은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의회도 독재자들도 미처 다 처리할 수 없는 데이터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따라서 지금의 정치인들은 1세기 전의 정치인들보다 생각의 규모가 훨씬 작다.

그 결과 21세기 초, 정치는 장대한 비전을 잃었다. 정부는 단순히 행정부가 되었다. 정부는 나라를 운영할 뿐 이끌지 못한다. 교사들의 급여가 제때 지급되고 하수도가 넘치지 않게 할 뿐, 향후 20년 뒤 나라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고 있는 유발 하라리 교수가 최근 펴낸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의 한 구절이다.

정부가 미래의 비전을 설정하지 못하고, 단지 행정적인 처리만 하는 기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AI 사태’에서의 정부 역할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아니면 ‘행정적인 처리’조차 사치로 보인다.

지난해 12월부터 6개월 동안 4000만 마리의 가금류가 땅에 묻혔다. 4월 4일 이후 추가 발생이 보고되지 않자 농축산부는 5월초 위기경보단계를 ‘경계’에서 ‘관심’으로 하향 조정했고, 13일엔 전국 이동제한조치도 해제했다. 5월 31일 평시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AI는 재발했다.

 

대체 배운게 뭐지?

 

그런데 “왜 평시체제 전환을 서둘렀느냐?”는 질문에, 농축산부는 “AI 바이러스는 열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과거 발병 사례에 비춰 봐도 추운 겨울철에 바이러스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고 여름철에는 발병 빈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해명이다.

또 “당국은 아직까지 정확한 바이러스 감염원인을 파악 중이지만, 철새에서 유래된 바이러스가 오골계 종계에 잠복하다 발병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여름철에 가까운 무더위 속에서 발병한 사례는 이전에도 수 차례 있었다. 2014년과 2015년이 그랬다.

그렇다면 농축산부는 앞선 사례들에서 대체 뭘 배운 걸까? 평시체제도 왜 한 달의 ‘어느 날’이 아니고 꼭 ‘말일’이었어야 했을까? 달력이 넘어가 새로운 달에 새롭게 시작할 첫 날이라는 의미였을까?

최근 OECD 대한민국 대표부는 ‘한국:AI 등 가축질병 대응을 위한 OECD 정책 권고’를 통해, 농업인의 바람직한 가축질병관리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농업인 행동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적절한 정보·교육·훈련을 제공하고, 경제적 보상정책을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한 데 이러한 것들이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급격한 집약화가 고병원성 가축질병 재발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여전히 소규모 고령농가가 다수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림어업 총조사·가축통계조사 등을 통해 축산농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소규모 농가가 제외되는 통계의 비현실성이, 악성가축질병의 되풀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또 정부의 가축질병정책이 규제 및 금전적·형사적 벌칙 강화와 교육·훈련 확대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도 보완해야 할 점들이 많다고 했다. 농축산부는 4월 13일 개선대책 마련 당시에는 OECD 보고서(4월 27일 발표)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개선대책을 내놓은 상태로, 대부분의 개선점을 시행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제발 장기적 안목을

 

보고서가 지적한 ‘소규모 농가’의 경우, ‘취약농장’으로 규정하고 1농장 전담공무원제를 도입해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축산부는 악성가축질병이 발생한 후 언제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그리고 원인에 대해서는 ‘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적시했고, 더 나아가서는 확산의 책임을 농가의 부도덕성에 전가했다. 따라서 대책도 규제일변이었다. 이 때문에 항상 ‘미봉책’이라는 질책을 받아왔다.

OECD도 농업인의 잘못된 행동과 보상금 삭감을 연결하는 것은 일단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좋은 원칙이라고 지적했지만, 벌칙을 단순하고 명확한 신호를 주는 프로그램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책은 규제를 목적으로 해서도 안되고,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도 안된다. 대한민국의 축산업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때문에 장기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빠진 채 「발생→초동방역실패→대규모 국가적 손실→농가의 책임→강력한 규제」의 악순환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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