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출근 길. 집을 나오자마자 보도블록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낯익은 물체 하나. 산들바람에 나풀대며 마치 유혹의 손짓을 보내는 듯하다. 침침한 눈을 문지르며 고갤 숙이자 초록색 지폐에서 세종대왕님께서 웃고 계신다. 사람은 없고 “이게 왠 떡이냐” 싶어 날름 집어 들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강동역에 내렸다. 가끔 아침에 출출할 때면 들르던 24시간 분식집에 들어갔다. ‘공돈’도 생겼겠다. 좀 비싼 콩나물 라면을 시켰다. 그리고 몇 젓가락을 뜰 때 갑자기 목이 매인다.

 

누군가에겐 생계비

 

지하철 5호선 강동역엔 인력송출업체가 있다. 소위 ‘노동시장’이다. 허름한 복장에 가방을 매고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24시간 분식집엔 호출을 기다리거나, 일터로 떠날 사람들이 끼니를 때운다.

그들을 보면서 나에겐 잠깐의 기쁨을 선사할 뿐인 ‘만원’이, 누군가에겐 하루를 살아가는 비용이고, 또 누군가에겐 몇 일을, 아니면 일 주일을 살아가는 ‘귀한’ 생계비라는 생각이 스치자 더 이상 라면을 먹을 수가 없다. 내가 도대체 뭔 생각을 한 걸까? 가슴이 답답해 한 참을 그대로 있다가 도망치듯 분식집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의 즐거움이 마음 한구석에 생채기를 남기며 30여년 전으로, 그리고 더 이전으로 돌아가게 했다.

대학 시절. 써클 동기와 대학로를 걷다가 갑자기 동기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저 노점상 아줌마 길에서 밥을 먹네.” 난 그를 보며 “그게 그렇게 우습냐?”고 쏘아붙였다. 그는 내게 “왜 그렇게 화를 내냐”며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난, 지금은 철거돼 지하철 4호선 길음역이 들어선 곳에서 살았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앞 집에 살던 후배는 철공소에서 일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0살 때 그곳에서 아버님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님이 기자 생활을 하실 때부터 미용으로 생계를 꾸리셨던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미용으로는 살 수가 없으셨던지 동대문 광장 시장에서 노점을 하셨다. 단속반원들의 행패를 피해 도망다니며 억척스럽게 남매를 키우셨다.

 

세번의 눈물 앞에선

 

나는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싸움질을 배웠다. 정능과 우이동 건축현장에서 철근을 끊고, 케이블선을 짤라 고물상에 팔고 그 돈으로 짜장면 등을 사먹었다. 길음시장에서 아주머니의 장바구니에 있는 지갑을 훔쳤다. 그런 것들이 ‘죄’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저녁 늦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 모습을 본 주변의 어른들이 훈계를 하면 대들었고, 그러다 ‘저런 호로새끼’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쌍욕’을 하며 대들었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그날도 이웃 어른과 싸우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어야 할 집안에 어머니가 말 없이 앉아계셨다. 그리고 와락 끌어안으며 아무 말씀도 없이 우셨다.

그때 이후로 난 세상에 있는 둥 없는 둥 살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네가 완전히 철거되면서 길음동을 떠나 더 이상 형들이나 친구들과 만나지 못했기에 그런 행동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목표가 없었던 나로선 삶 자체가 그저 그랬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그때를 포함해 세 번을 우셨다. 대학 안 간다며 허송세월을 보낼 때, 경찰서에 끌려가 몇 일을 잡혀 있을 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르쳐야 할 것들이라며, 당신은 한 잔도 못하시면서 일요일엔 안방에 술상을 차리시고 술 좌석의 예의를 가르쳐주셨고, 당구를 못 가르친 것에 미안해 하셨다. 또 기회있을 때마다 “너를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분이 6년 전 대장암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을 앞두고 떠셨다. 난 그때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다. 대신 “다음엔 내 딸로 태어나 달라”고 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이 얼마나 알까? 그저 ‘내리사랑’이라는 구실을 달거나, 부모의 의무 아니냐는 자기 위안만 할 뿐이니까….

 

후회하지 않으려면

 

2년 전 어머니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시며 야학을 다니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상을 타오면 그렇게 좋아하시며, “영희는 좋은 대학까지 보낼꺼다”라면서 어머니를 데리고 친구분들에게 자랑하러 다니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시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아마 어머니도 당신의 부모님이 그리우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야학에서 쓰러져 119를 통해 응급실에 가셨다는 것이었다. 전날 밤을 새신 것이 원인이었고, 뇌에 아주 작은 알맹이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4월,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원하시던 대로 팔순에 야학을 졸업하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지금껏 말하지 않으신다. ‘너희를 위해’라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나도 ‘사랑한다’ 말해 본 적이 없다.

‘뇌에서 심장까지의 거리는 30센티미터도 안되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는 30년도 더 걸린다’고 한다. 사람은 각자의 사연이 있다. 이별 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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