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먹을거리와 관련해서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일부 동아시아를 비롯 아프리카 10억의 인구가 ‘기아의 시대’를 살고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다행(?)스럽게도 ‘보릿고개’의 터널을 이미 벗어났다.

코스트코를 비롯한 이마트 등 대형유통 매장을 찾으면, 전 세계 곳곳에서 생산되는 수천·수만 가지 종류의 식품들이 빼곡히 진열대에 들어차 있다. 그 많은 식품 앞에서 선택지도 무한한 듯 보인다. 내 지갑에 돈만 두둑하다면 어느 것이든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그 풍요로움 앞에서 오히려 선택에 어려움조차 겪는다.

 

먹거리 안일함 만연

 

하지만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이 ‘장보기’가, 식량 가격의 폭등으로 서너 배 뛰었다고 가정해 보자. 보통의 중산층 이하라면 선택의 즐거움은 곧 ‘곤혹’스러움으로 변한다. 물건은 그대로지만 그것을 구입하는 데에는 ‘기회비용’이라는 경제적 선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통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감자나 호박이나 두부 중 하나나 둘을 빼야하거나, 온전한 된장찌개를 먹기 위해선 다른 비용을 줄여야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상품을 살만한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없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다. 그 큰 매장의 진열대를 가득 채웠던 물건들이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가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나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식량을 충분히 자급하지 못하면 언제든 어느 때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2015년 곡물자급률이 23.8%로, OECD 34개국 중 32번째인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렇다.

“없으면 수입해다 먹으면 된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같은 농업에 대한 경시풍조 때문에 곡물만이 아니고 소고기 37.7%·돼지고기도 76.7%로 크게 하락했다. ‘돈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물질만능주의나 천박한 자본주의 사상이 정책에까지 스며들어 국민 먹거리에 대한 안일함이 나라 전체에 만연해 있다.

‘나비효과’란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조그만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에 커다란 토네이도를 발생시킨다는 과학이론이다.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 온다는 의미다. 2010년 8월 러시아는 곡물 생산량 급감을 이유로 밀 수출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2010년 하반기부터 국제 밀 가격이 크게 올랐다.

 

곡물가격 변동 불안

 

이 상황이 국제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곡물가격의 상승은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을 발생시킨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물가 상승을 촉발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밀 가격이 상승하면 밀가루 가격이 오르고, 밀가루로 만든 과자, 라면, 국수 등 식품 가격이 덩달아 올라 전반적인 물가상승을 유발한다.

러시아로부터 밀을 수입해 오던 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재스민 혁명에 잇따라 우리가 ‘중동의 봄’으로 알고 있는 일들이 터져 나왔다. 빵과 쿠스쿠스(으깬 밀로 만든 북아프리카 음식) 등을 먹는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밀은 주식과 마찬가지다. 이집트는 세계 1위·알제리 6위·리비아는 23위의 밀 수입국가다.

2008년 상반기에도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필리핀·아이티 등 폭동이 일어난 30개국 이상의 국가들이 식량 가격 인상 반대 등으로 폭동과 총파업에 직면했다. 2월엔 카메룬과 세네갈·부르키나파소에서도 그랬다. 또 그 해 쌀 가격이 급등하면서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세계 1위 수입국 필리핀과 태국·베트남 등에서 위기가 발생, 쌀 사재기 금지·1인당 구매 제한 조치까지 발동됐다.

김화년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식량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은 신흥국들의 경제 성장 등으로 잉여에서 ‘불충분’, 금융자본의 곡물시장 지배력 강화로 가격의 변동폭이 커지고 잦은 이상기온의 발생으로 안정에서 ‘불확실’, 농산물 매개 질병과 악성가축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안심에서 ‘불안전’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식량 주권 지켜지길

 

게다가 러시아는 2007년부터 석유수출국기구(OPEC)이 석유 생산량을 조절함으로써 이를 무기화한 것처럼, 일명 ‘곡물 OPEC’를 창설해 식량을 무기화하려는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여기에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은 곡물 자급률 23%인 대한민국으로선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될 처지다.

자급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수입 구조까지 소수 국가에 의존하고 있어 더욱 우려스럽다. 한국이 대표적으로 수입하는 곡물은 옥수수, 밀, 대두인데, 대부분 미국, 중국, 브라질, 호주 등에서 공급받고 있다.

특히 한국인의 식습관이 쌀 위주에서 밀 위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는 상황에서 밀의 자급률이 1.2%라는 것은, 국내 물가를 수출국의 상황에 맡기는 꼴이다. 우리는 이미 2008년 등 급격한 물가 파동을 몇 차례 겪은 바 있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렇다고 국민들은 새로운 정책들을 마구 쏟아내길 바라지 않는다. 안정적이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먹을거리만이라도 국민에 내놓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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