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오지에서 글로서리 스토아(glossary store-식료품점)를 몇 년 하다가 되팔아 약간의 돈을 번 후배가 얼마 전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저녁을 함께 했다.
“형, 한국은 참 웃기는 나라예요. 정형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 외국인이 이해하긴 더 어려운 나라임엔 틀림이 없고요. 어떻게 보면 후진국인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참 다이나믹한 나라예요.”
“하긴 부끄럽기도 하다가도 뿌듯할 정도로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하니 그럴 만도 하지.”
펄럭이는 벅찬 감동
무슨 뜬금없는 대화인가. 제3자가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만하다. 그런데 그게 최근 수 개월 동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연결된 이야기라고 하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가 ‘웃기다’고 한 말의 의미에는, ‘촛불’과 ‘태극기’가 같은 장소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경찰들은 부지불식간에 사고가 날까봐 그 중간에 차단막을 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뿌듯할 정도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겪어온 역사의 어느 한 순간도 수 백만 명의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단 한 번의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던 성숙한 시민의식에서다.
하지만 탄핵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에 우려되는 것은 과격한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세대 간의 극심한 대립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이 폭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다.
‘촛불’과 ‘태극기’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굳이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다. 특히 남북한의 대립 관계에 있는 대한민국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촛불 앞에선 개인의 애잔한 감상과 찢어져 흩날리며 저 높은 고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는 가슴 벅찬 감동이 전혀 다른 심상은 아니기에 그렇다.
촛불은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말하듯, ‘이미지의 시대, 상상력의 시대를 새롭게 열리게 한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자기성찰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앞에 서면 언제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자기 반성’또는 ‘성찰’이다.
자기 반성·희생의 뜻
자기 반성이라는 의미가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스통 바슐라르가 정의한 ‘상상력은 미래를 유혹한다’에 동의한다. 플라톤 이래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한 가상으로 억압되어온 이미지가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로, 철학의 지배·예술의, 그리고 이데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의 시작, 그것이 바로 촛불이라는 작은 불꽃이라고 그는 말했다.
‘태극기’는 좀 더 포괄적이다. 거기에는 개인들의 반성도,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희생도 모두 포함된다. 태극기 자체가 한 국가의 역사이기 때문이기에 그렇고, 특히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36년 간의 일제강점기를 통해 독립을 위해 기꺼이 제 몸과 가족을 희생했던 이들과,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의 역사를 온전히 간직해 왔기에 우리에게 태극기는 단순한 ‘국기’가 아니다. 촛불이 자기 반성으로부터 보다 나은 미래로의 결심이라면, 태극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상징물로써 개인의 ‘희생’이 전제가 된다. 그 두 개의 상징이 하나의 광장에서 마치 적대적 관계로 지금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고 웃기는(?) 현실이라고 후배는 말했던 것이다.
우리의 화제는 왜 태극기가 성조기와 함께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에 상징물로 등장했느냐로 옮겨갔다. 그는 “태극기를 더럽히는 행위”라고 규정했지만, 그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60대 후반 이상의 노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 그들에게 태극기를 들라고 부추겼는 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태극기의 의미는 젊은층이 갖고 있는 의미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생존을 절박하게 고민해 왔던, 그런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희생’은 삶이자 하나의 미덕이었다. 국가지상주의에서 매몰된 ‘개인’은 당연시되는 현상일 뿐이었다. 40대 초반 이하의 청장년층의 체험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뿌리 깊게 파고든 현상은 ‘이념’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젊은층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사고의 틀’이다. 태극기 집회를 단순히 ‘고집불통’이라거나 ‘노친네들의 생각 없는 행동’이라거나 ‘수구꼴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나의 태극기가, 우리의 태극기가 거리 곳곳에 나뒹굴고, 꼬질꼬질 땟국물이 묻은 채 아무렇게나 구겨져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후배의 말에 무게가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남성들은 징집·징용에 갖가지 수탈로 전 국민이 몸으로 겪었던 일본강점기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행위를 듣고 볼 때마다, 그에 저항했던 조상들의 격렬한 저항과 비참한 최후를 알 때마다 끌어안고 함께 울고 싶은 것이 태극기다.
무능한 정부의 탓으로 매번 고통을 받아야 하는 국민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항상 앞장서 희생해야 했던 것도 태극기 앞에서다. 태극기는 일부 집단이 ‘수단’으로 들고 나설 물건이 아니다. 모두가 눈물로 품어야할 우리만의 사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