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전초는 그 해 5월 5일, 전국 신분회 모임에서부터다. 전국 신분회는 14세기 초에 생긴 기관으로 성직자·귀족·평민의 대표들이 모여 왕이 세금을 걷어도 좋다고 동의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해 신분회는 175년 만에 처음 열렸다. 루이 14세는 툭하면 전쟁을 벌였고 15세도 여러 번 전쟁을 치뤘다. 그때 마다 패배하면서 나라 빚만 늘어 결국 외국에 손을 벌려 돈을 빌렸지만 이자 갚는 데에만 한해 예산의 절반 이상을 쓸 정도가 됐다.

 

소수만이 특권 누려

 

그래서 성직자·귀족·부유한 평민의 대표들을 불러서 토지 재산에 세금을 매길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2대1의 투표 결과 언제나 특권층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1789년에는 달랐다. 제3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른 두 신분의 대표를 합친 만큼이라도 대표를 뽑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제3신분 대표들은 인구 전체의 98%를 대표함으로써 진정한 주권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예전 같으면 반역죄에 해당했다.

국가 재정은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아지는데 적자를 메우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왕은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귀족에게 걷어야 했지만 귀족이 반발했고, 이 문제를 국민들의 대표들이 모여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신분사회였기에 소수만이 특권을 누렸다. 인구 대다수는 농촌에 살았고, 대부분의 세금은 농민이 냈다. 도시민은 어떤 물건을 소비하면 소비세를 냈고, 귀족은 대개 세금을 면제 받았다. 자신들은 나라를 지키니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피의 세금’을 낸다고 그럴 듯한 이유를 댔다.

성직자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라는 세금을 걷으면서 한편으로는 나라에 돈을 냈다. 그런데 그들은 5년에 한 번 기부금의 액수를 정한 뒤 1/5씩 나눠서 냈다. 그동안 자기 수입이 늘거나 물가가 올라도 정한 돈만 냈다. 농민들에게는 5년 동안 물가에 따라 세금을 걷으면서도 자신들이 내는 돈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금’이라고 칭했다.

농민들은 이렇게 피를 빨렸고, 흉년이 들면 굶어 죽고, 겨울철에는 더 비참했다. 가난한 사람은 면역력이 없기 때문에 가벼운 설사병에 걸리거나 감기에 걸려도 쉽게 죽었다. 그들 주위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고, 농민과 노동자는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다. 임산부는 죽음을 연상시켰다. 산욕열로 죽는 임산부, 어머니 배 속에서 죽어버린 아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통계는 4명의 아이 가운데 1명이 돌을 맞이하지 못했다.

 

“권위 도전 응징 할 것”

 

●6월 17일=국민의회를 만들면서 제3신분 대표들은 자연스럽게 국회의원이 됐다. 루이 16세는 언짢았다. 그는 앙투아네트 왕비와 자기 동생들, 대신들의 말을 듣고 제3신분이 모이던 회의실을 고친다는 핑계로 닫아버렸다. 루이 16세는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국회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만일 그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법을 만드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6월 23일=왕은 “…과인은 모든 백성의 아버지로서 또 왕국의 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진정한 정신을 되찾고 그것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단호히 응징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병력 2만 명을 베르사유에 집결시켰다.

●6월 24일부터 왕과 측근들은 군대에 희망을 걸었지만 수비대는 파리에서 북쪽 외곽에 있는 생드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이를 불복하고 오히려 파리 시민과 합세했다.

●7월 14일 화요일=이날은 1년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바스티유 정복’이 시작된 날이다. 파리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은 1789년 7월 14일의 사건, 파리 시민의 승리를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 이날을 국경일로 기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이 됐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까지 5년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시작은 그 이전 세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국 신분회를 소집하면서 불거졌다.

 

왕정은 이미 끝났다

 

아무도 그 긴 기간 동안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되는 일대 혼란기를 겪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는 부패하고 부조리한 사회에서 이미 태동된 것이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물꼬가 터졌을 뿐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막으려 했던 루이 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 대한민국도 역사의 큰 줄기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그것도 세 번째다. ‘4·19’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6·10 항쟁’은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100만 시민의 촛불은 물론 대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온 나라를 혼돈에 빠뜨리고, 자괴감 속으로 몰아넣은 박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국민’과 ‘애국’이다. 해 왔던 국정 전반이 불신임을 받고 있는 지금도 그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정말 뜻이나 알까?

역사는 흐른다. 그리고 역사의 큰 물줄기는 권력층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배받고 고단한 민초가 만드는 것이다. 민초가 횃불을 들 때 역사는 출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수 많은 ‘피’를 요구해도 말이다. 왕정은 이미 끝났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