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개막됐던 브라질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전처럼은 아니었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면서 밤새 TV 앞에 앉았다. 한국 양궁의 쾌거는 자부심을 선사했고,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에서의 박상영 선수의 기적 같은 대역전극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새기게 했다.

특히나 13대9로 끝난 후 잠시의 휴식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조용히 ‘할 수 있다’고 되뇌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겼던 3세트 대역전극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시합 내내 올림픽의 정신에 입각해 ‘즐겼다’고 했다. 그러나 각종 경기를 보는 내내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의 편협된 해설이나, 과장된 언어는 심기를 건드렸다. 오히려 경기를 방해하는 꼴이었다.

 

그릇된 부추김 한 몫

 

근대올림픽은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땅의 노력으로, 1894년 6월 23일 소르본 대학에서 열린 국제스포츠대회에서 유럽 각국의 대표들의 만장일치로 시작됐다. 당초 그의 의도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패배로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은 점차 퇴색되고,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면서 테러가 일어나는가 하면 대회를 보이콧하는 사례까지 빚고 있다. 여기에는 각국 언론들의 부추김이 한 몫하고 있다. 과열된 취재는 각국의 그릇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세계 평화라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분열이 조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아니고 피 튀기는 경쟁과 총 없는 전장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왜곡은 자칫 국가지상주의를 초래해 독재체제의 보호막 역할을 한다. 독재자가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3S’다. 즉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s),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이 그것이다.

대중을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순치(馴致)정책의 한 전형이다. 되도록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라는 의도로 쓰는 정책이다.

 

민중은 바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1980년대 이전처럼 어리석지 않다. 우리의 입장에서만 보고, 우리의 입장으로 평가하는 편협한 경기의 해설을, 편향된 언론의 논조도 좋아하지 않을 만큼 균형 감각도 가지고 있다. 지금 온갖 부정과 부패일색인 정부 관료들은 대중의 관심이 올림픽에 쏠려 있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바램과 달리 국민들만 올림픽을 즐겼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올림픽 이전과 다름이 없다.

청와대 비리의혹 수석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원하고, 그를 감싸 안는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지지 철회를 선언한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은 당연히 썩게 마련이다. 국민은 깨끗한 물 속에서 살고 싶다. 대통령은 자기 위주의 ‘애국’을 원하지만 무엇이 애국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썩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추상적 개념도 생기지 않는다.

‘부정청탁금지법’은 그 썩은 물을 훑어내고 맑은 물을 만들자고 시작됐다. 그 좋은 의도에 농축산업이 큰 피해를 입게 됐다. 호소도 해보고, 우격다짐도 해보고, 줄기차게 억울함을 주장해보지만 지금 고립무원의 상태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 골든타임이라는 다급함도, 대통령을 비롯 청와대는 ‘국기 문란’을 운운하며 억압할 뜻을 보임으로써 농민들의 억울함도, 함께 매몰돼 가는 상황이다.

전국한우협회는 협회 내에 ‘김영란법 개정 대책 특별상황실’을 만들고, 각 도지회·시군지부에서 국회의원들의 동의서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22일 현재 61명의 국회의원들이 서명했다. 농촌지역 국회의원들의 참여와 달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수도권 의원들의 외면은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준다.

 

브랜드가 무슨 소용

 

축산물 브랜드페스티벌이 몇 일 앞으로 다가왔다. 2000년 축산물 수입개방과 함께 한우농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격’을 버리고 ‘품질’에 승부를 걸었다. 농가들이 조직화 되고, 한우를 개량하고, 사육방식을 바꿨다. 그렇게 고품격화하면서 외국산 소고기와의 싸움에서 그나마 견뎌왔다. 브랜드 페스티벌은 전국의 우수한 고품격의 축산물을 소비자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하지만 앞으로 그것도 소용없게 됐다.

부정과 부패는 한우농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한우농가는 외국산 소고기와 경쟁하기 위해 10여 년을 피땀 흘리면서 품질 향상을 시켜온 것 뿐이다. 정부의 실패한 한우산업안정대책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유지해 온 것이 죄라면 죄다.

한우농가가 나라를 망친 것도 아니다. 한우농가는 줄기차게 묻는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FTA로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외국산 소고기와 경쟁해야 하고, 그동안 힘들여 만든 경쟁력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 비라도 시원하게 내려 이 폭염을 좀 식혀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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