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가의 농민들은 헐값에 들어오는 미국이나 EU의 곡물과 경쟁하기보다는 수출용 작물을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 조정했다. 브로콜리나 당근, 토마토를 재배하기 위해 주식작물 재배를 축소했다.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선택하면서 신품종 종자, 농기계, 농약, 비료 등을 구입했다. 부유한 국가의 다국적 농식품 기업은 빈곤한 국가에 더 많은 종자와 농기계, 화학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개도국이나 빈곤 국가의 소농들은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돈 되면 어느 곳이든

 

신품종의 종자는 몇 해 동안엔 수확량이 증가하지만 농지의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점차 지력이 고갈된다. 그에 맞는 비료를 구입하기 위해 또 빚을 져야 한다. 그러다 작황이 나쁘거나 재배한 상품이 제값을 받지 못하면 빈곤한 소농은 땅을 포기하거나 삶을 포기한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에 인도 전역에서 약 20만 명의 농민이 자살했다.

아이티는 전체 인구의 80%가 하루 2달러에 못 미치는 돈으로 연명했는데, 2008년 초 넉 달 동안 쌀값이 2배로 뛰었다. 그해 곡물 가격 폭등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빚으로 허덕이던 소농들은 자신들의 농지를 내놨고, 다국적 농식품 기업들은 힘들이지 않고 헐값에 매입했다. 이렇게 거래된 토지는 주로 국내 소비용 식량을 생산하는 농지였지만 수출용 작물이나 농산업 원료 생산 용지로 전환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경제 발전이라는 이유로 해외 자본을 유치했고, 그렇게 영입된 다국적 농식품기업들은 해당 정부로부터 막대한 혜택과 특혜-환경 규제 완화, 최저 급여 미적용, 세금 할인 등-를 받으며 농촌을 잠식해 들어갔다.

무력으로 제3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만, 아직도 피지배국들은 식민 잔재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3.0 시대에서 경제적 식민지로 다시 전락되고 있다. 떠도는 투기자본은 돈이 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고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앞서 풀어놓은 이야기는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국한된 예가 아니다. 대기업 특히 대한민국에서 대기업들과의 처참한 먹이사슬로 연결된 중소기업의 대다수가 겪는 고통이다. 단지 농지를 빼앗기는 것과 자본·기술을 약탈당하는 것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슬그머니 용도 변경

 

그런 대기업들의 손길이 농촌으로 뻗치고 있다. 그중에는 오래 전부터 땅 재벌로 알려진 기업도 있다. 처음에는 구실도 좋았다. 선진화된 농업을 통해 국내 농업 발전을 견인한다는 둥, 새로운 첨단 시스템을 도입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사탕발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추구한 사업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용도가 변경되어 농업이 아닌 놀이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이런 기업을 포함해 다수의 대기업들이 아름아름 축산업에 진출해 규모를 확대하고 있고, 자사의 농업법인을 상장해 떠도는 자금을 유치하고 있다. S 그룹은 사료업체를 인수해 사료 생산량만큼의 마리수를 확보하기 위해 농장 구입을 적극적으로 수소문하고 있으며, D사는 조선소 부지 10만평에 모돈 1000마리 규모 3개소의 양돈장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

한돈협회가 즉각적으로 반대성명을 냈다. 2013년 3월 15일 양돈관련 5대 기업은 ‘현재의 비육돈 사육 마리수 기준으로 향후 더 이상 늘리지 않겠다’고 협회와 한 협약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한돈협회는 해당 기업들에게 중단촉구 서한을 보낸 상태다. 축산관련단체들의 성명도 잇따랐다. 대기업의 축산업 진출을 중단하고, 정부는 각종 제도 정비와 철저한 관리 감독을 해야 한다는 요지다. 특히 기업의 농업회사법인 설립 및 상장을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농사법인의 경우 대기업이 직접적으로 농축산업에 진입할 경우 반발이 예상됨으로써 이를 완화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라는 것이다.

 

궁극의 목적은 ‘돈’

 

대기업의 농축산업 진출을 단순히 ‘농민을 노동자로’ 사회적 신분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땀의 대가로 급여를 받는 노동자의 신분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막강한 자본력과 정부로부터 갖가지 혜택을 받는 대기업이 농축산업에 진출하면, 중소규모 농가는 그들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고 결국에는 터전을 잃게 된다. 그들이 포기한 터전에 대기업은 규모를 더욱 확장한다. 터전을 잃은 농축산인은 그들의 농장에 고용돼 급여를 받거나, 지역을 뜰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이 ‘악덕기업’으로 전락하는 것을 바라는 CEO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법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실적’ 때문이다. 떠도는 투기자본이 유입된 대기업의 자본구조에서 적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적위주의 경영에는 도덕성이 끼여들 여지도 없다.

최근 한 업체가 중국산 오리고기를 수입해 국내 오리고기 시장을 분탕질했던 일들은 어쩌다가 한 번의 일이 아니라 비일비재할 것이 뻔하다. 그들에게 국내 농축산물의 자급률은 시답지 않은 일이다. 처음에 그럴 듯한 명분을 들이밀어 헛갈리게 할 테지만 기업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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