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뒤(조선이 멸망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던 무단통치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학살·투옥 당했다. 핍박에 참다 못한 전체 민중이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폭발한 그 ‘3·1운동’의 3월 1일이 또 지났다.

그러나 여느 해 ‘3월 1일’보다 더 가슴에 아로 새겨지는 건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일 등의 군사·외교적 분위기가 조선 멸망의 시기와 비슷하고, 이에 대응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확신 없는 외교 그리고 그 결과 중 하나인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한일 외교합의’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라 망한날 ‘ 조용’

 

3·1 독립선언 민족대표자 중 한 명인 최린(崔麟)은 1910년 8월 29일,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5년 뒤 대한제국이 명목상 지구상에서 사라진 날 남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목격한 거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거리를 살펴보니 각 상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오백 년 왕국이 하루 아침에 망하는 이날에 이렇게도 평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상한 감상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 민족은 특별히 애국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에 이 원수의 날을 평온하게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맞이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우선 간단한 이유로 조선은 원래 왕국이 전제정치인 동시에 귀족의 계급정치였다. 더구나 그 종말의 난정(亂政)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정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민중은 이날을 국가가 망한 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이 망한 날이라고 보는 편이었고, 조선이 망한 뒤에는 그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반 평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중류 이상 인사들로 말하면 어느 누가 뼈에 사무친 망국지한(亡國之恨)이 없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부터 두문불출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비통했다. 나라는 이미 망했고, 과거의 모든 희망도 꿈으로 화하고 말았다.”

경제·대외사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개항기를 연구하고 있는 젊은 학자인 김윤희·이욱·홍준화 씨 등 3명의 공저 「조선의 최후」는 왜 조선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선이 멸망해 간 과정을 담담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그 과정들 속에서 1980년대 말부터 글로벌리제이션으로 금융 개혁과 자유화가 추진되면서 1990년대 중반 금융 위기가 오고, 이후 자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전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도 일깨워준다.

 

외세의존 허무한 일

 

청과 일본이,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찢어 나누려고 했던 야욕은 일본의 승리로 온전히 그들에게 넘어갔지만 결국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립국화’ 하려고 했던 조선의 미국에 대한 믿음도 그들의 자국 이익논리에 배신당했다.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서는, 다시는 그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국제 정세를 꽤뚫어 봐야 하고, 격동의 흐름 속에서 분단국가로써 또는 아직도 약소국으로써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정말 고민하고 있다면 국민적 공감대가 최우선임을 한민족의 역사는 보여주고 또 보여줬다.

자국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킬 능력도 없이, 선언적 의미의 독립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구한말의 역사만 떼어 놓고 보아도 분명하다. 타국의 힘에 의존한 외교는 물론이고, 그토록 굴욕의 역사를 안겨준 일본과의 물밑합의는 국민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의문을 충분히 갖게 한다. 왜?왜?왜? 그럼에도 충분한 답변이 없다.

청과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러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일본이 이를 충분히 견제할 만큼의 힘을 갖길 바랬던 국제정세가, 조선이 최후를 맞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500년 간 조선은 부정과 부패, 무능과 고루한 사상으로 찌들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딱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백성 존중심이 우선

 

을사조약을 끝까지 거부했던 고종, 나는 도장을 찍은 적이 없다는 순종의 회고담, ‘내가 죽어 조선이 산다면 기꺼이 죽으리라’는 명성황후의 소설과 드라마는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사실을 왜곡시킨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의 책임자는 전제군주로서 왕이었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의 제1조는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보호하며, 황실의 안녕을 약속 한다’였다.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갑오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외세인 청군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일본군에 의해 민중인 농민군 수 만명은 잔혹한 학살을 당했다. 황실의 안녕을 지킬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대신 도장을 찍었던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다.

마지막 조선, 대한제국의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왕과 소수의 관료들 뿐이다. 최린이 조선이 멸망하는 날 보았던 민중들의 그전과 다름없는 일상은, 착취의 대상이고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에겐 왕이나 국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는 바로 거기 있다.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