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이지. 우리가 그나마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우리가 사회에 나가서 당시 우리들이 그렇게 비난했던 기득권층의 연령대가 되면 우리 자식들은 우리들처럼 학창시절을 시위로 보내지 않고, 자신들만의 꿈을 자유롭게 찾아다니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11월 14일 광화문 집회에서 만난 친구는 시위 중간에 빠져 나와 피맛골의 한 막걸리집에서 옛 생각을 떠올리면서 울었다. 미안해서, 인생의 황금기에 빚에 쪼들리고, 꿈조차 꾸는 것이 사치인 지금 20대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광화문에 나왔다고 속죄 아닌 속죄를 하면서 눈물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 습관처럼 TV를 켰다. 일부 종편에서는 마치 전쟁이나 난 것처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위를 실시간 중계하며 불법집회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심지어 한 여성 앵커는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고까지 비난했다. ’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일부 정치군인들의 쿠테타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치켜세웠던 그 언론이 말이다. 그 이듬해 5월 광주항쟁 때 침묵으로 일관했던 바로 그 언론이 말이다.

 

모여 책만 봐도 간첩

 

“형 저것 좀 봐” “응? 뭐”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서써클의 한 후배가 가리키는 한 쪽 구석에 간첩신고 포스터가 있었다. “뭐 임마” “형 아래 쪽을 자세히 봐봐” “…”. 5명의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중국집이나 레스토랑 등 음식점에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뭔가를 읽고 있는 사람’도 간첩 신고 대상이었다.

탱크가 교정으로 들어오고, 머리가 길다고 공수부대원에게 경찰서로 끌려가 머릴 깎이다가 반항했던 누군가는 가위로 찍히기도 하고, 학보사의 친구는 뭔가 잘못 썼다가 어딘가로 며칠씩 끌려갔다 오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가끔씩 늦은 저녁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을 마시면 누군가 술 값을 치루고 가기도 했다. 구석에 혼자서 잔을 기울이다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곤 술 한 잔씩 권하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자리를 뜨던 해직기자도 있었다.

 

싸워야 할 대상 뚜렷

 

사복경찰이나 체포조에 좇겨 어딘가로 뛰어들면 숨겨 주고, 심지어는 수고한다며 먹여주기까지 했다. 그만큼 학생이나 일반인들이나 함께 싸워야 할 뚜렷한 대상이 있었고,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에서처럼 ‘배고파서 비틀거리는’ 일반인들을 대신해서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 학생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386」이라는 훈장을 달았다.

집 주변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던 판국에 동장은 어느 집에 어디 학생이 사는 지 알았고, 시위 날짜가 비밀리에 잡혔어도 관할 경찰서에서는 어김없이 집으로 안부 전화를 걸어 왔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학회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왜곡되기는 해도 가끔씩 방송이나 신문에서 시위 이야기가 나오면 부모들은 ‘자식찾기’로 이곳 저곳을 돌았다. 공무원은 물론 회사원까지 연좌의 벌을 뒤집어 썼다.

시위 주동자로 찍히면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지고, 도망을 다니다 잡히면 교도소를 가던지 군대를 가야 하는 선택지가 놓였다. 그래도 그 정도는 좀 나은 편이었다. 심각한 시위라면 끝없는 고문이 이어지고, 그보다 덜하면 먼저 강제로 군대로 보내지고 부모님들이 나중에 알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대목에서 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 고난의 길을 걸었는 지 말이다. ‘민주화’라고 규정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보다 거창한 뭔가가 있어야 했는 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렇게 순박했느냐고 묻고 또 묻고 목을 졸라서라도 답을 듣고 싶다.

학원 자율화가 오기 전 도서관에서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주동하려는 친구가 그 이유에 대해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이제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데 지금과 같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하고, 자신이 없어. 차라리 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나의 이력에 흠집을 내려고 해.”자율화가 오면서 그 친구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졸업 후 은행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자주 가는 좋은 술집이 있다며 사당동으로 끌고 갔다.

 

정말 나도 한몫 했나?

 

누구는 노동 현장으로, 농민운동으로 뛰어들었고, 누구는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가 시위 전력을 ‘장기’삼아 노무담당으로 발령을 받아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노조 탄압의 전략을 세우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꿈을 잃었던 학창시절의 시간을 뒤로 하고 사회인이 되어 교정을 떠났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태풍처럼 몰고 갔던 그 시절을 보내고, 먹고 살기 위한 세상으로 나오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그 과정 내내 뿌듯해 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나도 뭔가 한몫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386」 우리는 사회 기득권층의 최고 정점에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2030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세대가 됐고, 기득권층에서 떨궈져 나갈까 두려워하거나, 가진 것을 지키려 하거나, 더 가지려 하는 참으로 파렴치한 모습으로 변질됐다. 그렇게 생각되니 우리가 사랑했던 대한민국이 21세기 헬조선이니 불지옥이니 불리우는 건 정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화살은 「386」이 맞아야 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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