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벅찬 목장 일…악으로 깡으로 버텼죠”

 

국내 축산업에서 낙농분야처럼 여성 축산인들이 중심 역할을 하거나 단체 등 관련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해 “그만큼 낙농산업은 세심하고 꼼꼼한 손길과 주의 깊은 관리가 필요하기에 그렇다”고 입을 모은다.

본지는 창간 25주년을 맞아 여성 낙농가와 낙농관련단체에서 오랜 기간 종사해온 낙농전문 여성들, 그리고 농림축산식품부의 낙농(개량) 담당 여성 공무원을 초청해 낙농산업과 함께 해온 이들의 삶과 애환, 보람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길게는 20여년 넘게 산업에 몸담아 오며 산업의 일원으로, 혹은 산업 발전의 숨은 일꾼으로 자신들이 겪어왔고 담당했던 일들을 담담히 고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낙농목장인 ‘한독목장’, 지금의 안성팜랜드에서 진행된 여성 낙농인들의 좌담회를 특집으로 엮었다. <편집자 주>

 

사회=오늘 좌담회는 여성 낙농가부터 오랫동안 낙농관련단체와 정부에 몸담고 계신 여성 낙농 관계자들을 모시고 낙농산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낙농안에서의 여러분 삶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먼저 참석한 분들의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최문숙 대원목장 대표= ’95년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낙농에 뛰어들었다. 얼룩덜룩 소가 있다는 것만 알았던 주부에서 낙농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시작단계에서는 목장경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목장을 잇겠다는 결심까지 삼칠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남편과 사별 후 목장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당시 납유처인 빙그레에서 2등유가 나온다면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부터였다. 생전 목장이 인생의 전부인줄알고 살던 남편의 얼굴에 얼룩지게 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낙농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낙농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한 가지씩 배워서 낙농을 시작했다. 수의사와 사료회사 직원들이 멘토가 되어서 하나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재미라는 것을 알게 되고 목표가 생겼다.

 

김일량 한국종축개량협회 중앙유성분분석소장=’93년도에 유우개량부에 입사해 검정업무, 등록심사, 유성분분석소까지 협회내 유우개량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아직도 늘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성 낙농인으로써 본 보기가 될 수 있도록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 왔다.

 

배은아 서울우유 동부낙농지원센터 부소장=건국대학교 수의학과 졸업과 동시에 입사를 하게 됐다. ’93년도에 서울우유에 입사를 했는데 생각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사실 학교에서 수의학을 공부했지만 일선 현장에서 마주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학부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한 채 현장에 나가다 보니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입사동기가 4명이었는데 이중 3명이 그만두고 나 혼자 남게 됐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시작한다는 마음과 농가들에게 보탬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맡은 일에 전념했다.

 

조미예 농협 젖소개량사업소 팀장=’90년 농협중앙회(당시 축협중앙회)에 입사 했을 때까지만 해도 축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주변이 많이 개발돼 있지만 당시에는 산간벽지에 소재한 사업소의 위치 때문에 차도 안다니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 일까하는 의문을 품고 첫 출근 했던 당시가 생각난다. 아버지께 전화해서 “소가 있나 봐요. 소울음소리가 들려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입사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소를 봤으니 얼마나 생경했었는지 짐작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유미랑 축산정책과 주무관=이 자리에 모이신분들 대부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가까이 낙농산업과 인연을 맺어 왔는데 그에 비하면 저는 햇병아리 수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축산과는 관련 없는 업무를 주로 맡아왔다. 식물검역직으로 입사해서 쭉 식물검역업무를 하던 중 2008년부터 농축산부에서 국제 업무를 맡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일본 유학당시 축산과 관련된 업무를 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일본의 관광명소 마다 지역의 특산물처럼 지역 목장에서 생산한 아이스크림, 유제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귀국하고 배정받은 부서가 축산정책과였는데 이중에서도 가축개량을 맡게 되면서 낙농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가축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개량을 담당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됐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사회=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낙농산업 참 많이 변했다. 당시와 지금의 낙농산업을 얼마나 어떻게 변했나.

 

최문숙 대표=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다보니 정보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발품을 팔아야했다. 어디서든 교육이 있다면 쫓아가서 책이라도 얻어오고 귀로 듣고 메모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다보니 집에서도 교육을 받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변화가 가장 크다. 현장에서도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처음에는 바가지로 사료를 퍼주다가 지금은 kg을 입력하면 기계로도 급이가 가능하다. 이런 게 ICT 기술이라고 하는데 기술을 도입할수록 낙농을 하는 데는 수월하다. 내가 낙농을 지속해서 할 수 있게 된 이유도 ICT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김일량 소장=첫날 출근했을 때 한일은 작은 유성분 분석기를 가지고 분석을 하고나면 기다란 종이가 나왔다. 그 용지에 수기로 기록을 하고 제대로 적었는지 검토하는 데만도 한나절 이상이 걸렸다. 다음날 세수를 할 때 보면 토끼눈이 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수기 작업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등록 역시 지역낙협이나 축협에서 팩스로 보내주면 수기로 기록을 해서 알려주고 전산실에 보내면 다시 수작업으로 타자를 쳤다. 지금은 아주 훌륭해졌다.

검정원들이 컴퓨터에서 작업을 해서 입력을 하면 자동으로 시스템에 업데이트 되도록 개선됐다. 등록서에 사진을 첨부하는 것도 그때와 지금은 천지차이다. 당시에는 사진을 오려서 등록서에 잘라 붙였는데 무늬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일이었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전송받아 컴퓨터로 수정을 하니 무늬가 잘리거나 발이 잘리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나지만 당시만 해도 가위질 하나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 신중한 업무였다.

심사하는 경우에도 현장에 나가면 계획교배를 분석해서 정액을 추천해주면 수정사들의 항의를 받았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A라는 정액을 추천해줬는데 나는 B라는 정액밖에 없다는 등 (정액을)추천해준 협회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많았다. 수정사들이 저렴한 정액들을 보유하고 수정을 시켰었는데 왜 갑자기 종축개량 협회에서 기준을 정해주느냐는 항의 였다. 지금은 오히려 수정사들이 계획교배를 적극 부탁하기도 한다. 정액거래 역시 실명제로 실시되다 보니 많이 투명해졌다.

이 같은 정보들을 취합해 제공하고 농가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검정성적 관리와 개체정보 조회 등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ICT를 접목, 활용하고 있다.

 

조미예 팀장=입사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흘렀다.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면 아무래도 ICT가 도입되면서 개량화가 가속화 됐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함부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컴퓨터 없이는 업무를 할 수없다. 철재 캐비닛에서 컴퓨터를 꺼내 사용했다. ’95년부터 전산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DB를 구축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전산망을 구축하기 전에는 종이에 찍어서 농가에 발송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는데 전산망이 완료되자 자유로운 농가서비스가 이뤄졌다. 원하는 정보를 농가가 선택해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이에 찍어 보내던 자료를 이동하면서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수정 얘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국내 인공수정사의 시작은 젖소개량사업소부터다. 개량 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인공수정사가 필요했다. 젖소개량사업소는 정액을 만들면서 인공수정사 양성을 같이했는데 인공수정사가 특수직종으로 분류되다 보니 적기에 수정이 어려워 자가 인공수정을 원하는 농가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자가 인공수정교육을 도입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농가들이 올라와 1주일정도 체류하면서 자가 인공수정을 교육했다. 자가 인공수정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라 농장에 돌아가 첫 임신에 성공하고서는 떡을 보낸 농가들이 있을 정도였다. 교육 과정중에는 실제 생식기를 도축장에서 사다가 만져보게도 하는 등 실질적 교육과 보탬에 도움이 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었다. 젖소개량사업소에서 인공수정사와 자가인공수정을 양성한 결과 현재 수정사와 자가 수정은 6:4정도 비율에 달하고 있다.

 

유미랑 주무관=우리나라의 개량은 전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 유량은 우리나라가 3위다. 그러나 생산성 부분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료는 성과지표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일본은 유량보다는 효율을 중요시 한다. 개량 목표에서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에 다녀와서 느낀 점은 많은 종류의 소들을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목장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처음 농가에 가서는 깜짝 놀랐다. 개량은 많이 발전했지만 사양관리, 위생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배은아 부소장=실제로 원유품질은 세계적 수준으로 향상됐지만 소비자들이 낙농 현장을 본다면 우유에 대한 부작용이 생길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톱밥 우사가 낙농가들에게는 편리하지만 보기에는 좋지 않다. 또 우리나라의 원유 유통은 중국보다 낙후됐다. 우리나라는 10도씨 아래인데 중국은 4도씨 이하이다. 앞으로는 유통 가공에서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낙농가에게도 늘 얘기한다. 누군가의 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주길 바란다고.

첫 업무를 배정받을 때가 국내에 세균수 대비 유대산정체계를 처음 도입할 시기였다. 그 당시 세균수, 체세포수, 유질에 비해서는 지금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 당시 상황은 현재와는 달랐다. 가수 분석기가 ’96년 도입됐는데 그전에는 캔에 우유 샘플을 떠서 비중계를 넣어 확인했다. 보다 정밀한 분석기가 우유의 빙점을 검사 할 수 있게 됐다. 실린더에 우유샘플을 받아서 우유 비중계를 띄운 뒤에 온도에 따라 부피가 달라지고 그런 부분을 검사했었다.

유질 검사, 분석, 판매, 현장수의직들을 돌아다니다보니 우유의 품질이 많이 나아졌다는 걸 알게 됐다. 우유에 대한 오해 중 물을 탔다는 게 있는데 그런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싶다. 유제품에 대한 우수성을 알려주고 싶다. 우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낙농가와 업계에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사회=그동안 여러분들이 낙농 산업 안에서 몸담고 일해 오며 여성이기에 더욱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을 것이고, 여성이기에 더 큰 보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일해 오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나 잊지 못할 기억은 뭔가.

 

최문숙 대표=2010년 FMD가 가장 가슴 아팠다. 저녁 12시가 되니 살처분 장비들이 목장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내일 전쟁이나 나라’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나면 이 소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목숨을 잃게 될 테니. 살처분 후에는 목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갈피를 잡았었다. 같은 이유로 또다시 소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청소를 해서 허가를 맡고 허가가 나오면 공장 임대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가를 맡고나니 지인분들이 소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싣고 오셨다.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 건네며 소를 내어줬다. 그 덕에 다시 목장을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것은 모두 다 딸 덕분이다. 어릴 때부터 딸이 목장을 아끼고 가꾸던 모습을 보았던 지인들이 딸을 위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당시 딸은 타지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는 언제든 다닐 수 있으니 엄마와 함께 있겠다고 돌아왔다. 지금도 늘 가슴에 걸린다. 부모의 마음에는 더 편한 일, 더 번듯한 일을 하길 바랬지만 그때 뿌리치지 못하고 목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김일량 소장=낙농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 낙농인을 그때나 지금이나 찾기가 어렵다. 입사 당시만 해도 여자 직원과 남자직원의 차이가 있었다. 여자직원들은 주로 내근을 하고 외부 업무는 남자직원들 위주로 맡겨졌었는데, 나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상관들이 현장경험을 쌓아야 한다면서 현장에 나갈 일이 있을 때 동행하도록 배려해줬다. 그 때문인지 사무직에만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농가들이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봐 주시곤 한다. 여성 낙농인으로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과 농가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는 마음 이었는 데 인정해 주시니 감사하다.

 

배은아 부소장=이런 말을 하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좀 남다르게 씩씩했다. 여자라서 어려웠던 기억은 사실 거의 없다. 반면 사소한 것에도 보람을 느끼곤 하는데 가장 보람 있는 것은 항상 농가에서 일을 해결하고 지도했을 때 고맙다고 알아줬을 때이다.

’93년~’94년 2년간 북부센터에서 근무했을 당시 세균수 검사하는 것 때문에 밤을 샌 적도 있다. 밤을 새더라도 내 업무니까 누구에게 미룰 수 없었기에 기꺼이 임했다. 여자라서 나는 열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웃음)

한 가지 아직도 가슴에 맺힌 서운함을 말하자면 진료파트에 근무할 당시 현장 지원을 갔는데 농가가 “재수 없게 여자가 왔어”라고 말한 것은 충격이었다. 여자인 게 무엇이 문제지? 라는 생각과 함께 여자가 하든 남자가하든 차이가 없고 또한 여자인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오기로 더 열심히 했다. 지금은 그 농가와 가장 친한 사이로 지낸다.

 

조미예 팀장=낙농하고 개량에는 여성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만큼 세심하고 꼼꼼한 손길이 필요하다. 전국에 현장 조사하는 감정원들이 230명 정도 있는데 여성비율이 월등히 높다. 조합 직원이 아닌 검정원들은 성비가 8:2정도 된다. 10명중에 8명이 여성이다. 목장에서도 여성비율이 절대 낮지 않다. 기계를 돌리고 인공수정을 하고 착유를 하는 것은 같이 하지만 소 개체 정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체크하는 몫은 거의 여성 낙농인들이 담당하고 있다.

 

사회=최문숙 대표와 조미예 팀장은 직접적으로 FMD를 겪었는데, 떠올리기도 쉽지 않겠지만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말씀을 부탁드린다.

 

최문숙 대표=아침 8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살처분 작업이 진행됐다. 축산과장이 하루 종일 집을 지켰다. 살처분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나가보니 우사가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널브러진 주사기를 보고 이거 한방 맞으면 나도 죽으려나 싶었다. 저녁에는 송아지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다. 저녁에 축산과장이 전화가 왔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중심을 꽉 잡고 있으라고 부탁했다. 그때 섬뜩했다. ‘이때까지 나만 생각했구나…’ 하면서 자식들을 지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엄마로 돌아가 애들이 우선이지. 그러고 나서부터는 씩씩하게 다시 생활을 시작했다.

 

조미예 팀장=기억에 가장 남고 힘들었던 순간은 FMD 때문에 아이들과 생이별을 했어야 했던 시간이다. 2010년 70일 정도 사업소에 방역을 위해 갇혀있었다. 크리스마스 며칠을 앞두고였다. FMD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종축 보호 때문에 고양시에서 첫 번째 백신을 맞춘 뒤 출입이 금지된 채 오로지 사업소 안에서 생활했다. 당시엔 얼마의 시간이 걸릴 줄 모르고 하루 이틀을 지냈다.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더라면 다른 생각을 해볼 법도 했을 텐데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모두 다독이며 잘 참아오던 중 명절 전날 멍하니 티비쇼를 보다가 한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그 방에 있던 여자직원들 모두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젖소개량사업소가 보유중인 종축들과 시험축들을 보존하기 위해 무주사업소에 소를 분산하기로 했다. 분산 작업을 위해 전날까지 모든 준비를 다 마쳤는데 농축산부에서 연락이 왔다. 무주 사업소에는 한우 종모우를 옮겨야 하니 젖소는 이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계획을 중단하라는 말이었다.

도입우를 들여와 국내 환경에 알맞은 한국형 종모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게 젖소개량사업소 직원들의 큰 꿈과 비전이었는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까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고 있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중단되더라도 수입해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 후로 2년간 괴리감에 휩싸였다.

 

유미랑 주무관=FMD가 발생하면 젖소개량사업소 뿐 아니라 한우개량 사업소도 방역 시스템상 오랜기간 출입이 금지된다. 주무부서는 충분한 검토를 해서 결정한 일이지만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 같다. 앞으로 현장과 더욱 긴밀히 소통하며 사업을 진행해 나가겠다.

 

사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문숙 대표=대원목장이 지금 현재 한수 이북에서 가장 큰 목장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제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내가 해왔던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대원목장은 아들, 딸에게 맡기고. ICT 융복합 협회라는 것을 설립했다. 한국형 ICT 낙농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낙농가들 평균연령이 57세다. 진입농가는 어렵고 기존 농가들로 이뤄져야 하는데 기존농가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 인터넷을 통한 교육과 협의체를 잘 운영해서 낙농협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고 싶다.

 

김일량 소장=최근 분석소로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680농가 중 검정사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기록관리가 잘 안되었다거나 소소한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가와 전화통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사무실전화로는 연결이 잘 되지 않아 개인 휴대폰을 이용해 통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전화상으로 업무연락을 하고 농장에 방문하면 대부분 농가들이 잘 따라준다.

검정농가들의 건의사항을 수렴해 사업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개량사업 활성화로 한국형 보증종모우 생산에도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 생각한다.

 

배은아 부소장=낙농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FTA영향력 안에 휩싸이고 있다. 한국에서 낙농분야가 많은 타격을 받아서 생존법을 생각해봤다. 한국시장이 취약한 부분이 시유시장에만 국한돼왔다. 기자재, 첨가제 등 관련 사업들이 많은데 소비자한테 외면 받으면 관련 산업들도 다 무너진다. 시유시장에서 벗어나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유제품이 계속 개발돼야한다. 세계 시장 트렌드도 읽고 연구개발도 끊임없이 이뤄져야한다. 내목장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보전달도 중요하다. 농가들이 하나로 단합해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모두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를 바란다.

소비자에게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낙농산업을 만드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 농가들이 스스로 노력을 했을 때 정부에서도 도울 의지가 있을 것이다. 내 목장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나 사회적 흐름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고 앞으로도 농가들의 계도나 교육에 보다 많이 노력해 나가겠다. 진통을 겪으면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미예 팀장=현재 우리나라에 낙농가들이 5000호 남짓 있는데 이중 절반이상 100두 가까이 되는 낙농가들이다. 대부분이 대농이자 전업농이다. 이들이 지속가능한 낙농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개량성적 관리, 정보 제공 등의 사업들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농협중앙회 젖소개량사업소가 실시하고 있는 검정사업은 보다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낙농을 돕고 있다. 한 달에 한번 문자서비스를 통해 농가에 성적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현 사업들의 ICT연계 까지 검토 중에 있다. 아울러 현재 실시하고 있는 후대검정사업을 토대로 신뢰도 높은 한국형 씨수소선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인터불(Interbull, 국제젖소유전평가기구)에 한국형 씨수소 십여 마리가 상위에 랭크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미랑 주무관=농축산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필요한 수요가 있고 예산을 따서 반영을 하는 것이다. FTA와 관련해서 우수 수정란들을 도입 해서 보증 씨수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도입하는 것 뿐 아니라 한국형 종자를 마련하는데 예산을 반영하려고 계획 중이다. 젖소 수정란 센터라는 이름으로 2년에 걸쳐서 젖소개량사업소내 수정란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할 계획이다. 매년 도입우 수입 당시 많은 예산이 수반되고 있어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앞으로도 애로사항들을 잘 수렴해서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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